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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은늘 Oct 21. 2022

#7 스타트업 다니는 미천한 마케터의 인생

뭣도 모른 죄

"여름 님, 제발 누끼 하나만 따주면 안 돼? 아이스크림 쏠게요."


애라는 모처럼  예민해 보이는 디자이너 김여름을 찾아가 애걸복걸했다. 그 대가로 5  받은 psd 파일은 누끼가 매우 너덜너덜하게 따져 있었으나 후회해도 늦었다. 이미 애라는 김여름의 손에 이끌려 7,500원짜리 배라 파인트 아이스크림을 결제했으므로. 세금 떼면  190  정도 남는데 벼룩의 간을 절여 먹는구나. 최대 월드콘 정도를 생각한 애라는 조금 억울해졌다.


'아니 누끼 나 좋자고 따는 거야? 이게 다 김영화 씨 회사 잘되라고 하는 일인데?'


마케팅 디자이너를 뽑아주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바라긴 한다.) 적어도 마케팅팀이 공용으로  포토샵 계정이라도 사줘야 하는  아닌가? 그래야 디자이너 손을 타지 않고도 마케팅 콘텐츠를 만들 텐데 대표 김영화는  기본적인 비용도 쓰기 싫어 차일피일 미루는 중이다. 파워포인트로 요리조리 이어 붙이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포토샵 작업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마케터 독고애라는 신중해져야 한다. 일정 때문에 독이 바짝 올라 있는 상태가 '아닌' 프러덕트  디자이너를 눈치껏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유메 상, 스미마생이 무슨 뜻인 줄 알아?"

"지경 쨩. 그거 유메 나라말이야. 미안하다, sorry잖아."

"틀렸어. 스미마생은 '스타트업 다니는 미천한 마케터의 인생' 줄임말이야."


주방 한쪽에 늘어져 턱을  동기 김지경도 뭔가 심사 꼬인 일이 있었는지 일본팀 유메를 데리고 자학하고 있었다.


"에에? 지경 쨩, '미처난'은 뭐예요? 2천 원? 미쳤다?"


그래, 우린 미천하기도 하고, 2천(6백만) 원이기도 하고, 미쳤기도 하다. 그렇지만 애라가 100번도 더 본 애니메이션 '뮬란'에서 '역경을 이겨내고 핀 꽃이 가장 아름다운 꽃이다'라 했다. 뮬란 세계관에 따르면 스타트업의 꽃은 마케터다. 가슴이 벅차오른 애라는 주먹을 꽉 쥐고 힘차게 들어 올렸다.


"스미마생의 '미'는 미녀야. 스타트업 다니는 미녀 마케터의 인생. 바로 나지!"


개소리. 눈으로 욕한 김지경은 고개를 저으며 자리를 떴지만, 착한 유메는 '쏘 데쓰! 키레이!!'라며 애라에게 엄지를 치켜세워줬다.


"아리가또, 유메 쨩. 아나따가 베스트 스윗 니혼진 데쓰"


구사 가능한 모든 일본어로 친근감을 표한 애라는 유메에게 어깨동무를 하다가 마침 내려다보이는 창밖 뷰가 훤하고 좋다는 생각을 했다. 마케터한테 포토샵은 안 사주면서 판교에 폼나는 고층 사무실을 쓰는 '김즈'. 회사 수준 이상의 아름다운 사무실은 개발자 유인책이다. 우리의 왕, 우리의 복 되신 개발자.


스타트업 입문 3개월 차, 애라는 자신이 개발자와 상극이라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개발자에게 애라가 상극이다. 그들은 애라가 떠듬떠듬 네이버 검색창을 띄울 때마다 여기 구글로 검색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며 치를 떨었다. 입사 지원서를 hwp로 냈다는 애라의 말에도 단체로 고통스러워했다. 노트북이 움직이질 않는다거나 프로그램이 안 깔린다고 개발자에게 도와달라고 했다가 일장 연설을 듣기도 한다. 특히 백엔드 개발자 김일훈에게 걸리면 "나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니 구글링해라."로 시작하는 잔소리를 귀에 피가 나도록 듣게 된다.


"일훈 님, 제가 일훈 님이 개발자라서 이런 말을 여쭙는 것이 아니라요. 그 누구의 도움이라도 간절해서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것인데요. 제 컴퓨터가 에러가 난 것 같아요. 강제로 끄기라도 하고 싶은데 안 먹혀요. 서비스 센터에 가기엔 지금 김 이사님이 시키신 일이 엄청 급한데 방도가 있을지요."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급했다. 김일훈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뻔했지만, 애라는 최대한 불쌍한 척을 한다. 김일훈은 역시 인상을 찌푸렸다. 입으로 뱉은 말은 애라의 예상과 달랐지만.


"이걸로 어떻게 일해요? 바꿔 달라고 해요. 회사 컴퓨터 중에 이게 제일 똥컴일 듯."


김일훈은 깐깐하고 엄격하지만 막말을 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애라의 노트북이 이견 없이 똥컴일 뿐이다. 입사 당시 이름 모를 퇴사자에게서 물려받은 애라의 맥북은 마치 아오지 탄광에서 건져 올린 것처럼 모니터에 흠집이 가득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신규 입사자의 기기 구매를 담당하고 있던 초기 멤버 김삼식의 실수였다고 한다. 직전에 입사한 개발자 컴퓨터에 예산을 오버해서 쓰는 바람에 애라와 김지경이  노트북 대신 똥컴을 받게  것이다. 김일훈 측은한 눈으로 잠시 바라보다가 애라의 똥컴을 건네받았다. 기다리는 동안 애라는 김일훈 자리에서 빛나는 맥북 프로 15인치를 보았다. 개발자도 학원 있는지 물어보면 화내려나. 구글링할까. 달달한 사탕을 굴리고 있었는데도 애라의 입에서 자꾸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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