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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은늘 Oct 22. 2022

#8 아니요, 나는 마케터가 아니에요.

뭣도 모른 죄

스타트업 입문 6개월, 애라는 이제 자신이 이 회사의 불가촉천민이라는 정도의 인식은 생겼지만 아직 자신이 마케터라는 점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애라의 주장은 이렇다. 채용 공고에 '콘텐츠 스페셜리스트'라 적힌 것을 보고 지원을 했고 해당 분야 면접을 거쳐 들어왔으니 '콘텐츠 스페셜리스트'인 게 타당하다는 것이다. 사실 '김즈' 조직도에는 '콘텐츠 스페셜리스트'라는 직함이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 당연하다. '콘텐츠 스페셜리스트'라는 명칭은 마케팅팀 지원자가 너무 없자 김삼식이 마치 연애 프로그램 출연자 직업 소개처럼 있어 보이는 단어를 마구 붙인 것이니까. 인력난에 시달리던 변방의 스타트업이 임시방편으로 쓴 이름이었지만, 언론고시에 실패한 애라의 마지막 자존심이 되었다.


애라는 자신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달라지면서 적성에 맞는 다른 길을  좋게 찾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어린 애라는  몰라서  PD만이  적성에 맞는 일을 하는 것이라 믿었지만 스마트폰이 생겨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이건 종편 방송이 허가 나면서 애라가 지원할  있는 대한민국 방송국이 4  늘어났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확장이었다.


실제로 '김즈'에서의 업무는 애라의 적성에  맞았다. 커뮤니티에서 많은 조회수와 댓글을 받을만한 인기 콘텐츠를 창조하는 행위만으로도 크리에이티브에 대한 애라의 갈증이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애라는 지난 4년간 언론고시를 준비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에게 재능이 없는 것일까  두려웠다. 그런데  오랜 걱정과 불안을  보답받는 것처럼 '김즈' 유저들에게 콘텐츠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을 얻는 것도, 회사의 칭찬도 기분이 좋았다. 갈구면서도  이사는 애라를 '김즈' 연예 분야 에디터로 키워주겠다고 미팅에 끌고 다니기 시작했다. 에디터 정책은 '김즈' 기본 철학과 맞지 않다며 김영화의 반대에 부딪히고 있지만  이사의 청사진이 성공하면 애라는  이상 페르소나 뒤에 숨어서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식 에디터 뱃지를 달고 일할  있을 것이다.


"기대하지 마세요. 지금 발 앞까지 왔어요. 애라 님이 싫어하는 '마케팅' 일을 해야 될 거예요."


하지만 머리에 꽃밭을 일구고 콧노래를 부를라치면 김지경이 여지없이 애라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김지경은 스페셜리스트보다는 제너럴리스트가 꿈이라고 했다. 뭐든 다 해서 이 각박한 사회에서 살아남을 기술을 쌓아야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해서 김 이사가 시키는 일만 쳐내는 애라와 달리 김지경은 다른 부서들 사람들과 친목을 도모하며 일거리를 찾아 헤맸다. 손이 모자란 건지 동기 사랑인지 가끔 애라도 끼워주려고 했으나, 애라는 제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싶었다. 안 그래도 김하나로부터 월 1회씩 유저 대상으로 한 이벤트 진행을 도맡아줬으면 한다는 말을 듣고 불행해진 상태다.


"그래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니까요? 아니 그리고 이딴 게 뭐가 좋아요? 전 평생 콘텐츠나 만들고 있지 않을 거예요. 진짜 마케팅도 할 거고 기획도 할 거고 팀장도 될 거고 영업도 할 거고 힘이 되는 건 다 할 거예요."


진짜 마케팅이 뭐길래. '김즈'의 진짜 마케팅은 커뮤니티 팀이 하고 있을까? 바이럴 팀이 하고 있나? 김지경에 반응에 따르면 일단 콘텐츠 팀이 하고 있는 건 진짜가 아닌 듯하다. 애라는 김지경 덕분에 마케팅이라는 단어가 자신에게 들러붙는 것이 싫어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마케팅의 정의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 답이 무엇이든 싫어할 준비를 하면서.


그러나 애라의 인생은 항상 그랬다. 좋은 건 쉬이 이뤄지지 않고, 싫은 건 꼭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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