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고시생의 스타트업 적응기 #18
안녕하세요. 지난주 초부터 어드민 페이지가 작동하지 않는 것 꼭꼭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원인은 파악했지만 아직 고치지 못했어요. 그래서 또 기다려달라는 말 밖에 못할 텐데 이제는 떠나신다네요. 멱살을 잡으시지 않는 게 왜인지 섭섭하기도 합니다.
내가 퇴사한다고 하자 한 개발자가 보낸 메일 첫머리다. 나는 왜 멱살 잡는 마케터가 되었나.
마케터와 개발자는 많은 점이 다르다. 성향도 다르고 사고방식도 다르고 우선순위도 다르다. 우리 회사의 개발팀이 전원 남자라 유난히 더 그렇게 느꼈던 걸까? 그건 아닌 것 같다. 마케팅팀 역시 나를 제외하고 모두 남자였지만, 그들도 개발자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가면 낯설어했다.
"개발자들은 밥 먹을 때 저런 이야기 하나 봐"
개발자들은 음식점에 가는 와중에도 지하철역 안으로 내려가서 길을 건너는 것과 그냥 횡단보도를 통해 건넜을 때의 운동 에너지가 얼마 차이 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음식점에 자리를 잡으면 그곳에 있는 에어컨이라든가 전등을 보며 그 원리에 대해서 한참 토론하기도 한다. 애초에 그런 것을 진지하게 궁금해하는 것 자체가 마케팅팀 입장에선 이해하기 힘들었다. 보통 우리 팀은 식사 시간에 연예 가십으로 열띤 토론을 하거나 '만약에 ~하면 어떻게 할래?' 따위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개발자들도 마케터들의 대화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우리가 프로듀스 101 얘기를 할 때면 급격히 영혼이 빠져나가는 그들의 육신을 목격할 수 있다.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식사 시간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차이는 일할 때 더욱 극심해진다.
혹자는 부정할 수도 있겠지만 마케터 입장에선 마치 최전선에 배치된 군사가 된 느낌이다. 겹겹이 무슨 사정이 있었든, 사소한 오류가 반복되었든 간에 결국 마케터는 방어해내야 한다. 나도 버그는 자연재해이니 '어쩔 수 없다'고 쿨해지고 싶지만 회사는 '어쩔 수 없이' 구멍 난 며칠을 '어쩔 수 없지 않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만회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나의 저녁도 주말도 사라지는 것이지. '어쩔 수 없다'는 말이 통하지 않는 구간의 고통을 아는가.
처음에는 싱글벙글 웃으며 버그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서 그 누구도 사과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이야기하던 개발자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이 녀석 아주 똘똘하구나!!! 공감 능력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냐!!!!!!
하지만 곧 개발자들은 마치 봇처럼 한 번 입력된 것은 잘 따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딩순딩한 그들은 금세 나에게 적응하여 멱살이 잡히는 순간 '제 잘못이죠'라고 말하도록 설계되었다. 그럴 때마다 개발자 인권 보호에 힘쓰는 개발팀 리더가 "개발자에게 폭력을 쓰지 마세요" 하며 달려오곤 하지만, 나에게는 태연하게 "생산성 떨어지니까 (쟤) 화나게 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성과 만능주의 마케팅팀 리더가 있었다. 사랑이 넘치는 우리 회사.
유난히 기계치인 나는 인터넷이 안된다든가 컴퓨터가 움직이지 않는다든가 하면 개발팀을 어슬렁어슬렁 거린다. 화내지 않을 가장 순한 개발자 후보 중에서도 현재 가장 한가하며 예민할 것 같지 않은 개발자를 찾아 고쳐달라고 소곤소곤 말하기 위함이다. 그러다 근처에 있던 얄짤없는 마케터 퇴치 개발자에게 걸리면 "AS 센터에 연락하세요" 라고 단호박 먹은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 미안. 싫어할 걸 알면서 또 그랬어 후후후.
이처럼 마케터와 개발자는 서로 너무나도 달라서, 때때로 서로의 신경을 긁고 기분을 상하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쁜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잘 몰라서 서로에게 서툴러서 그런 것뿐이다. 조금만 노력하면 분명 마케터와 개발자는 좋은 콤비가 될 수 있다. 퇴사 즈음에는 이런 다정한 메일도 받을 수 있다. (800자 이상으로 제출하라고 입력값은 넣어주어야 함)
공대생의 시선으로만 세상을 보느라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볼 줄 몰랐어요. 그래서 마케터님은 제게 화성인 같기만 했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이제 그래도 조금은 마케터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주변 사람들과 대화할 때 조금 부드러워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감사합니다.
마케터님께서 다음으로 열정을 쏟을 곳이 어떤 곳이 될지 모르겠지만 그 회사에도 개발자가 있을까요? 만약 있다면 마케터님 사용설명서를 작성해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세상에는 공대생이 너무 많고, 그들은 마케터님을 빨리 이해해줄 수 없는 사람들일 거에요. 사실 알고 보면 마케터님이 따뜻하고 정 많은 사람이라는 걸 그분들도 빨리 알아챘으면 좋겠습니다.
매번 너네는 빈말도 할 줄 모르냐며 구박한 나에게 한 개발자가 메일 말미에 남긴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를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른다. 빈말은 못 하지만 언제나 진심인 개발자들이 좋다.
난폭하고 성질 급한 야생의 마케터를 받아줘서 고마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