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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selle Riyoung Han Jan 15. 2020

의미 없이 밀도 짙은 기억.

아이슬란드 음악에 대한 첫 기억


아이슬란드의 뮤지션, Olafur Arnalds에 대한 첫 기억이 있다.
파리 생활 4년 차였을 때이다. 겨울이었고, 그 시기에 나는 다니던 음악 학교에 적응해 가려고 신경과민에 걸려있던 상태였던 걸로 기억을 한다. 학교와 집을 오가는 스프링 인형처럼 하루하루를 반복했었고 악보와 악기 연습에만 파고들  뿐, 그 외의 일상이 없었다. 그렇게 건조하게 삶을 살아가던 나날 중, 프랑스 한인 사이트에서 한국 책을 판매한다는 광고를 보았고, 남자 친구를 앞세우고 약속한 곳으로 찾아갔다. 지금도 크게 나아진 것 같진 않지만 그때의 나는 다섯 살 여자 아이처럼 바깥세상에 두려움이 많았다. 

주소지로 도착을 했어도 어디인지 갈피를 잡지 못했어서 판매자에게 전화를 했다.  설명이 어려운 미묘한 느낌의 목소리, 짧은 전화 통화를 하면서도 느껴지던 묘한 분위기가 사라지기 전에 옆 코너를 돌아 한 사람이 나왔다. 그의 분위기가 전화 목소리보다 미묘해 당혹스러웠고 그런 나의 모습을 그가 분명 알아차렸을 것이다.
절반의 트랜스젠더라고 해도 괜찮을까, 수염이 거뭇거뭇했고 목젖이 또렷하게 나왔어도 그는 남자이기를 완강히 거부하는 모호한 여자남자 사람의 모습이었다. 가늘고 하늘하늘, 아담한 그를 따라 들어갔다.
구두 계약이 되어있던 몇 권의 책을 받고 값을 지불하는 동안 길지 않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5년 동안 파리에 살았고 패션에 관련된 일을 했었으며 지금은 많은 것에 환멸을 느껴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그의 이야기를.





그의 공간 속 통유리 너머로 느껴지는 바깥세상의 서늘한 겨울 공기가 출국을 목전에 두고 있는 소란스러운 그의 공간으로 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그의 공간 속속 배어있는 휑하고 어수선한 아림이, 심하게 요동치는 외로움과 불안감이 내게서도 훅 지나쳐 갔다.

여기저기 널려져 있던 물품들 속에서 의상 원단들과 소품들을 만지작 거리던 나는 금세 잊혀 버릴 질문들을 그에게 했었다. 한번 보고 기억되지 않을 관계이라는 것을 알아서였는지, 그 또한 거리낌 없이 대답을 해주었다. 버릴 수밖에 없는 원단의 자투리 몇 점을 그는 내게 주었다. 그의 공간에 널려져 있던 것들로 보아, 그는 존재감이 짙고 화려한 의상을 만들어 냈었으리라, 짐작을 했다.

한국말로 오고 가는 대화를 알아듣지 못한 채 내 옆에 서있던 나의 남자 친구에게, 우리가 오랜 기간 동안 커플이었냐고 그가 물었다. 그 질문 속에 그가 안고 있는 상처가 언뜻 흘러나왔다. 까닭 없이 내가 아팠다.

독특하고 강한 그의 아우라가 검붉은 빛깔로 곳곳에 채워져 있던 그 공간을 나오며, 나는 혹시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사이트가 있는지를 물었다. 기이한 감정이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찾고 싶어 하는 나를 느꼈던 건. 당분간은 방치해 둘 거라며 그는 내게 조각 메모지에 사이트 주소를 적어 주었다.


그의 공간에서 돌아온 후, 그 날의 이야기는 한동안 잊고 지내었고 몇 달이 지나고서야 그에게 구입한 책들을 뒤적였다. 묘하도록 헷갈리는 사람은 남겨 놓는 흔적들도 묘하게 아련하다. 책 속에 그가 낙서처럼 기록해 둔 몇 줄의 메모에 마음이 아릿했다. 그제야 다시 생각이 난 그의 사이트를 찾아갔다. 그의 말대로 방치되어 있던 가상의 공간은 실제 그의 모습과 분위기를 닮아 있었다. 그날 내가 잠시 보았던 그의 모습보다 짙고 황량하게 아픈 느낌이 배어있는 채.

Olafur Arnalds를 처음 들었던 것도 그의 사이트에서였다. 조용하게 슬픈 음악이 조심스럽게도 나를 잠식하려 든다는 느낌을 그때 처음 인식했던 것도 같다. 명치 깊이 들러 붙으려던 우울한 느낌이 소스라치게 싫었었는데 의식치 못한채 얼룩이 졌나 보다. 짧은 순간에 들었던 Olafur Arnalds의 음악을 지금도 종종 찾을 때가 있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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