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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selle Riyoung Han Feb 11. 2020

떠나는 날의 새벽 02;47


매번, 여행을 계획하며 만반의 준비를 하고 떠나려 하지만 지켜지지 않을 때가 있다. 의지가 상실되어 버리는 시기. 스스로 마음을 잡기 어려워 안일해지고 마는 시기. 여행지에서 무얼 하고 어디를 가야 할 것인지 구상하는 것조차 싫어서 차일피일 미루다 급작스레 떠나는 여행처럼 비행기에 오를 때.

바르소비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었다. 묘연하게 내 의지를 꽁꽁 동여매고 있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떠나기 전날 밤까지의 시간을 몽땅 쏟아 버렸었고, 엎치락뒤치락 대며 어렵사리 선잠을 꾸고 일어났던 그날 새벽녘에 그 감정이 '상실'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었다. 체념보다 가벼워도 기대 하나 없는 내적 상황. 하지만 괜찮았다. '상실'은 다시 채울 수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을 했었으니까. 바르소비 여행은 상실에서부터 시작해 보면 된다고 생각을 했다. 



그렇게 시작된 여행을 보내고 돌아와 파리에서의 삶을 다시 살아갔고, 겨울 여행을 떠나고 돌아온 그 날로부터 아직 일 년이 채워지지 않은 오늘, 나는 다시 슬로바키아로 '겨울 여행'을 떠난다. 

참 낯선 도시. 그랬기에 가고자 했던 의지와 호기심이 강하게 나를 자극시켰었고 다행히도 지금의 나는, 지난해에 바르소비로 떠날 때보다 활기를 띠고 있다. 언제나처럼, 새로운 것과 만나거나 새로운 일을 시도할 땐,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것들이 수북이 내 눈 앞에 펼쳐지기에 조급한 마음이 있기는 해도.

지금 파리는 새벽 2시가 조금 넘은 시각. 시멘트 벽돌 위로 떨어지는 굵은 빗소리가 단단한 2주 창문 너머로 들려온다. 매번의 여행처럼 이른 아침 비행기를 타기 위해 집 앞으로 와줄 새벽 택시를 타고 오페라 광장으로 가야 하며, 그곳에서 샤를르 드골  공항으로 출발하는 Orly 버스를 타야 하는 시간까지 4시간이 남았다. 

조금이라도 잠을 자야 하니 이젠 정말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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