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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주 Jan 08. 2019

야금야금 기내식 먹기

그렇게 급하면 어제 오지 그랬슈? 


여행 전날의 나를 이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다. 정말로 어제부터 가 있기 때문이다. 성격이 급해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 상태를 도무지 견디기가 힘들다. 평소에도 서너 시쯤 약속을 잡으면 점심시간부터 근처에 가 있는다. 오후 비행기를 타는 날이면 아침부터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는다. 그래서 가능한 새벽~아침 시간 비행을 선호한다. 여행지에서 하릴없이 얼쩡거릴지 언정 여기서 꾸물거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새벽 비행기를 타려면 더더욱 새벽같이 일어나야 한다. 못 일어나면 어쩌지? 결국 심적 안정을 위하여 전날 할 일을 모두 끝내고 나면 일단 출발해서 공항 근처 숙소에 숙박이라는 이름으로 대기하고 있는다. 


이렇게 일련의 갖은 고난을 끝내고 비행기에 안착해야 비로소 모든 긴장이 풀린다. 비행시간은 길수록 좋다. 열한 시간쯤 타야 하면 신이 나서 책과 노트를 주섬주섬 챙긴다. 그래 놓고 비행기 특유의 백색 소음에 약해서 내내 꾸벅꾸벅 졸기는 하지만. 바쁘지 않아도 괜히 한가롭게 쉬지는 못하는 프리랜서에게, 지금부터 일정 시간 동안 어찌할 도리 없이 앉아서 시간을 죽여야 한다는 조건은 상당히 달콤하다. 그런데다 밥도 주잖아? 편해서 좋네! 기내식에 대한 마음은 대충 이런 수준이다. 맛이 없다는 오명, 고도가 높으면 미각이 둔해져서 어쩔 수 없다는 변명, 이래저래 말이 많은 기내식이지만 원체 대량생산 도시락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아서 오히려 흥미진진하게 두리번거리며 기다린다. 



하지만 소금 간도 하지 않는 밥은 어떻게 단점을 가려볼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기내식으로 맛있게 먹기 참 힘들다. 지금까지 맛있게 먹은 기내식은 예외 없이 전부 면이었다. 그중 최고는 동유럽에 갈 때 탄 체코 비행기에서 준 맥 앤 치즈다. 햄을 쫑쫑 썰어 넣고 어디로 봐도 알 덴테는 아닌 푹 익은 마카로니를 찐득한 치즈 소스에 버무려서, 뜨끈뜨끈하고 짭짤한 맛이 딱 야식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먹는다는 텔레비전 디너풍 식사에 제격인 메뉴이지 않은가! 조금 더 소화가 잘 되는 면으로는 일본 국적 항공기에서 가끔 나오는 메밀국수가 있다. 먹을 때마다 생각하지만, 왜 메밀국수가 메인을 차지하지 못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사각형으로 딴딴하게 뭉쳐져 있는 밥 덩어리보다 낫지 않나? 물론 메밀국수도 한 덩어리가 되어 있지만, 쯔유를 부어서 휘저으면 호로록 풀린다. 동봉된 김 가루를 뿌리면 금상첨화다. 


비행기에서 제공하는 주류는 그럴 때를 대비해서 있는 게 아닐까(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아니다). 시간대에 구애받지 않고 술을 마시는 것은 휴가를 알리는 신호탄이다. 돌이켜보건대 비행기에서 술을 마시면서부터 기내식을 조금 더 좋아하게 되었다. 간이 센 편이라 안주로 먹을 만한 반찬이 어지간하면 하나는 있기 때문이다. 주로 출발하는 비행기에서는 한가롭게 와인을 홀짝이고, 도착하는 비행기에서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맥주를 벌컥 들이켠다. 기내는 건조해서 목이 쉬이 마르기 때문에 텁텁한 레드 와인보다 화이트 와인을 선호한다. 



딱 한 번 타본 미주 노선의 비즈니스석에서는 그릇까지 따끈하게 데운 견과류와 함께 멀쩡한 와인 잔을 제공받았지만, 일본에 갈 때는 보통 미니어처 병을 통째로 건네받는다. 그러면 반쯤 마시고 반쯤 남겼다가 아까워서 뚜껑을 잘 닫아 가방에 넣고, 결국 그날 호텔에 체크인을 하기 전까지 비상용 와인을 핸드백에 숨겨서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되고 만다. 길거리에서 갑자기 소고기 스튜를 만들 것도 아니고 비상용 와인은 어디다 쓰겠냐 싶지만, 갑자기 누가 뵈르 블랑(화이트 와인과 셜롯, 버터 등으로 만드는 프랑스식 기본 소스)을 만들어 달라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호텔 예약이 실수로 누락되어서 분노의 항의를 해야 할 때 혈관을 확장할 땔감용으로 써야 할 수도 있다. 어쨌든 유비무환이란 중요하니까.


한때 비행기에서 제공하는 음료 중 가장 인기가 좋은 것은 토마토 주스라는 소식이 널리 퍼진 적이 있다. 기압과 소음 때문에 단맛은 약하게, 감칠맛은 뚜렷하게 느껴지므로 천연 감칠맛 덩어리인 토마토 주스를 지상보다 맛있게 마시게 된다고 한다. 과학적인 설명에 힘입어 토마토 주스를 마셔봤지만, 익힌 캔 토마토 주스는 여전히 강렬한 쇳덩어리 같은 맛이었다. 가능하면 지상에서도 하늘에서도 익힌 캔 토마토 주스는 아무 양념 없이 들이키기보다 요리를 해서 숟가락으로 떠먹고 싶다. 차라리 사과 주스, 없으면 맥주를 주시오.



사실 비행기 안에서는 커피를 거의 마시지 않는다. 첫째로 휴가 중이기 때문에 정신을 또렷하게 차리고 싶지 않으며, 둘째로 커피잔에 콸콸 부어주는데 다 마시지 않으면 쏟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한동안 휩싸이게 되고, 마지막으로 괜찮은 디저트도 없는데 맛없는 커피를 마시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식사가 끝나면 책도 꺼내고 싶고 출입국 신고서도 작성해야 하는데, 평지에서도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에게 출렁이는 액체가 담긴 커피잔은 너무나 위험천만하다. 물론 멀쩡한 디저트를 주면 얘기가 달라진다. 체코 항공에서 체리가 들어간 노란 케이크, 그리고 화이트 초콜릿 치즈케이크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나왔을 때는 얌전히 커피를 받아서 조용히 야금야금 다 먹어 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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