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속도보다 사는 속도가 빠른 책 호더 hoarder가 3개 국어를 할 수 있다면?
안 그래도 책장에 이중 삼중으로 꽂고도 바닥에 첩첩이 쌓아두기 일쑤인 책 보유량이 세 배로 늘어난다. 이사할 때마다 이삿짐센터의 눈치를 보면서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팔고 버리려고 애쓰지만 책장 한 칸 정도 줄여 봤자 별달리 크게 티가 나지도 않는다. 어쩌다 보니 영어와 일본어로 번역을 하면서 먹고사는 사람이 되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짊어지고 온 책으로 책장 용적률을 과적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아니, 사실 읽을 수 있는 언어로 된 책만 사는가 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심지어 체코어(추측하건대)로 적힌 체코 전통 요리책도 서가 귀퉁이에 세 권 꽂혀있다. 이건 무슨 생각으로 왜 샀으며 과연 읽을 수 있을 것인가? 사실 단체 여행 중에 딱 하루 프라하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던 날에 구한 책으로, 온종일 각자 알아서 놀다가 오후에 만나 전리품을 자랑하는 자리에서 이걸 꺼냈더니 비슷한 질문이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구글 번역의 힘을 믿는다고 대답했다.
요리책을 살 때는 일단 레시피가 적힌 책이라는 점만 확인하면 된다. 기본적으로 썬다, 볶는다, 굽는다, 삶는다 정도의 지시어를 파악하면 어찌어찌 읽어나갈 수 있으니까. 인터넷 세상은 넓고도 방대하여 체코어로 적힌 재료 정도는 정체를 밝혀낼 수 있겠지. 이런 생각으로 자꾸 책은 늘어만 간다.
여행을 가서 요리책을 열심히 찾아다니는 이유는 어디에 가든 난생처음 먹어본 음식을 완전히 백지상태에서 만들어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물론 같은 요리도 가게마다 맛이 다르듯이 정해진 요리법이 있는 건 아니지만 기본 틀을 알아야 변형도 할 수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제대로 된 레시피는 현지에서 구해야 하는 법!
그래서 어디서든 서점만 발견하면 냉큼 들어가는 데다 서점 위치 미리 알아 두기가 여행 준비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시티 라이트 서점을 찾아서 차이나 타운을 가로질렀고 라스베이거스에서는 반스 앤 노블을 가기 위해서 고속도로를 탔다. 그리고 갈수록 서점에 들어가서 요리책이 있을 만한 위치를 찾는 기술이 는다.
여행지에서 요리책을 고르는 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진보다 레시피 위주의 일상 요리책일 것. 둘째, 가볍고 구성이 치밀할 것. 셋째, 제발 가벼울 것.
오해하지 말자. 두껍고 큼직하고 무겁고 올 컬러에 종이가 반짝반짝한 화보 같은 요리책도 정말 좋아한다. 하지만 서점을 하루 중 마지막 코스를 들리는 일은 거의 없고 굳이 무거운 책을 고르지 않아도 이미 무겁도록 산 책을 이고 지고 종일 돌아다니다가 캐리어를 아슬아슬한 무게까지 채워서 집까지 모시고 와야 한다. 정말이지 종이란 물만큼이나 대놓고 무거운 물체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무려 원조 자허 토르테까지 포기하고 서점을 찾아 들어갔지만, 정말 예쁘고 화려하고 무거워서 펼치면 아기 책상 정도 크기가 되는 요리책을 만지작거리다 포기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인연이라면 아마존에서라도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여행지의 요리책은 화보집보다 전통이자 정통인 주요 기본 조리서다. 사진은 없어도 된다(구글 신이 있으니까). 양장본이 아니라 요점정리 책처럼 생긴 녀석을 찾아야 한다. '가정요리 대백과' 같은 이름일 거라고 생각하자. 참고로 갱지로 된 손바닥만 한 체코 요리책은 프라하 성 기념품 가게에서 엽서들 근처에 꽂혀 있었다.
에세이를 읽다 보면 어머니나 할머니가 평생 모아 온 레시피에 대한 이야기가 가끔 나온다. 나름의 주석을 빼곡하게 달아 놓은 때 묻은 요리책이나 여기저기서 마음에 든 레시피를 모은 스크랩북 같은 식이다.
하지만 내가 제일 멋지다고 생각하는 레시피 모음집의 형태는 상자다. 파일도, 노트도, 서적도 아닌 철제 상자. 상자마저 언젠가 어디서 먹었던 추억이 깃든 과자 상자인 데다 그 속에 들어찬 손때 묻은 종이 쪼가리가 신문이나 잡지에서 그때그때 오려낸 레시피들이라면 거의 내 '운명의 레시피' 로망에 날아든 직격탄이나 다름없다. 왜 좀 천재 같고, 생각지 못한 만남으로 가득한 삶을 살 것 같고, 즉흥적으로 되게 멋진 일을 할 것 같은 사람이 할 법한 일이지 않나?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천재' 같고 '즉흥적'이고 '생각지 못한' 우연한 인연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발품을 팔아서 일부러 찾아다녀야 한다. 모순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결국엔 씨를 뿌려야 싹이 트는 법이니까.
생각해보면 직접 사 온 요리 잡지는 필요한 부분만 남긴 채 버리고 또 버려도 줄지 않고, 얇다는 이유로 <뉴요커>도 만날 때마다 사고, 주말을 끼고 미국에 가면 두껍다는 이유로 <뉴욕 타임스> 일요일판도 찾아다니고……
게다가 운명의 레시피를 찾기 위해 모으는 종이 쪼가리는 잡지에 그치지 않고 과자 상자나 텔레비전 화면을 찍은 사진까지 퍼져 나간다. 미국 드라마 <프렌즈>의 피비 할머니가 남긴 쿠키 레시피가 궁금해서 네슬레 톨 하우스 사의 초콜릿 칩을 한 봉 구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운명의 레시피가 아니라 만들어야 할 레시피의 부채에 허덕이는 훌륭한 호더다. 사놓고 읽지 않은 책과 모아놓고 만들지 않은 레시피에 대한 죄책감을 언젠가 터는 날이 오기는 올는지? 책장이 내려앉는 날이 먼저 올 것 같다.
* <온갖 날의 미식 여행> 단행본이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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