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코다테에서 먹은 샤인머스캣 포도
시장의 매력은 여행자일 때 훨씬 빛을 발한다. 어쩌다 보니 집 근처에 재래시장과 대형 마트, 창고형 마트가 즐비하여 어디건 걸어갈 수 있는 곳에 살고 있지만 평소에 장을 보기 위해 재래시장에 가는 일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나는 마음 불편한 가격 흥정과 눈치 보기를 꺼려하는 철저한 정찰제 인간이기 때문이다. 정말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호구라고.
원래 흥정이란 기세에 달린 문제인데 내가 기세로 밀어붙여서 해낼 수 있는 일은 밥값을 내 카드로 계산하는 것 정도다. 흥정의 달인이 이것도 깎고 저것도 깎고 이왕이면 덤까지 넣어달라고 요구하는 옆에서 방해하지 않고 슬쩍 떨어져 있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이다(그 정도면 됐으니 가자고 잡아당기고 싶어진다).
잔뼈 굵은 상인이라면 척 보기만 해도 만만찮은 손님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아마 내 이마에는 '호구'라는 글자가 3D로 떠올라 있을 것이다. 그냥 모두가 정해진 가격에 일정한 물건을 구입하면서 기력을 소모하지 않으면 안 될까? 정찰제는 그런 의미의 신뢰를 부여한다. 내 노력 여하에 따라 다른 값을 받을 수 있었을지 모르는 가능성을 원천 차단해 줄 것, 그로 인한 스트레스와 쓸데없는 에너지 소모를 줄여줄 것.
하지만 관광객이 되어 시장을 방문하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 원래 외지인이란 현지 물정 모르고 어수룩한 것이 기본이니 아예 마음 탁 놓고 구경을 한다. 그러면 집 옆 재래시장에도 분명 있었을 벌건 고무 '다라이'나 채반도 정겨워만 보이고, 국밥이나 파전을 잔뜩 먹고 배를 둥둥 두드리며 수수가루와 곤드레나물을 손에 들기 전까지는 도무지 발길을 돌릴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이다. 여러 모로 익숙한 국내 오일장도 이럴진대 타국의 왁자지껄한 재래시장은 그야말로 이국적인 풍경을 구경하는 최적의 장소다. 오히려 한없이 관광객을 위한 모습을 전시할수록 그에 맞춰 적당한 눈높이로 신나게 거닐 수 있다.
도심지에 가까운 관광지로 여행을 할수록 시장에서 현지의 일상을 체험하기는 힘들다. 시장이 이미 관광지화 되었기 때문이다. 남대문 시장을 생각해보자. 한국인도 물건을 사러 많이들 찾아가고 구석구석 필요한 물건들이 그득하게 있지만 그만큼 각국의 관광객도 많이 방문하고, 사방에서 최소 서너 가지 언어를 보고 들을 수 있다. 물론 숨겨진 맛집은 건재하고 우리는 만족스럽게 쇼핑을 할 수 있으며 관광객은 낯설지 않은 존재가 되어 통역이 없어도 편하게 구경할 수 있으니 서로에게 그다지 나쁜 결말은 아니다.
홋카이도 하코다테에 갔을 때는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지만 아침마다 조식으로 카레를 나눠준다는 도요코인 호텔에 묵었다. 마침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들린다는 아사이치 시장이 바로 옆에 있었다. 얼마나 가까웠는가 하면 하코다테 역에 내려서 큰길을 건너면 금방 아사이치 시장이 나오고, 거기서 작은 길을 건너면 호텔이 나온다. 당연히 만장일치로 아침식사는 그 유명한 해산물 덮밥을 먹기로 결정했으니 호텔에서 준다는 조식 카레를 볼 일이 없을 수밖에.
후에 하코다테 야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고 호텔까지 우리를 실어다 준 택시기사의 설명에 따르면 아사이치 시장은 관광객이나 가지 현지인은 너무 비싸서 가지 않는다고 한다. 둘러보면서도 충분히 짐작 가능한 일이었다. 가격이 비싸기도 하지만 관광객에 익숙한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모두들 휘적휘적 지나가는 우리의 국적을 가늠하면서 나름의 인사와 호객행위를 열심히 시도했다. 수조에서 오징어를 고르면 즉석에서 활어회를 먹을 수 있다고들 하는데, 딱히 오징어회를 먹을 기분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날렵하게 다리를 접고 앉은 털게를 한국까지 달랑달랑 들고 들어갈 것도 아니니 장식물 보듯이 구경이나 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한 과일가게 앞을 지날 때 점주 할머니가 친절하게 대왕 구슬 크기의 윤기 반질반질한 포도알 시식을 권하는 것이 아닌가? 청포도 사탕보다 크고 아주 반짝반짝 빛나는 포도알이 워낙 탄탄하고 완벽하게 붙어 있어서 시식용으로 잡아떼는 것 자체가 배덕하게 느껴질 정도로 예쁜 포도였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타고난 호구다. 눈을 마주치면서 손으로 건네주는 시식품을 먹고 사지 않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라 애초에 시식 코너를 멀리 피해 다닌다.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척 거절하는 건 조금 쉽지 않을까? 아니 무슨 과일을 시식까지 해.
하지만 톡 깨무는 순간 점주 할머니가 달리 보였다. 분명 이 포도를 보고도 지나가는 것을 보니 멋 모르는 불쌍한 중생이 틀림없구나 생각한 샤인머스캣 포도의 요정 대모 할머니였을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내가 처음 샤인머스캣을 맛본 순간이었다. 알이 굵고 과육이 탄탄하며 당도가 높고 무엇보다 시판 청포도 사탕과자에서 느껴지는 머스캣 향이 진한 품종이다. 그야말로 한 알로 갈증이 일시에 해갈될 정도로 촉촉하고 달콤하고 향기롭다. 한 송이에 한화로 2만 원 가까이했지만 일단 사서 질릴 때까지 먹어봐야만 했다. 그리고 아직도 질리지 않았다.
* <온갖 날의 미식 여행> 단행본이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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