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집들이 선물
부모님에게는 단골 과일 가게가 있다. 걸어서도 갈 수 있는 동네 가게라 전화로 포도며 수박을 주문하고 찾아올 수 있다. 착신 번호 표시 시스템 따위는 없을 것 같은 작은 동네 시장의 단골 횟집 사장님은 서울 말씨로 주문하는 유일한 손님이라며 ‘밀치 삼만 원어치요.’라는 말만 들어도 ‘응 그려~’ 하며 전화를 끊는다. 지금은 부모님만 사시는 고향집으로 우리가 이사 온 지도 벌써 이십 년. 그간의 세월이 쌓였으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혼자 서울로 상경한 지 십여 년이 지나도록 한쪽 손가락이 꽉 찰 정도로 이사를 다녔고, 앞으로도 최소한 두세 번의 이사를 앞두고 있다. 그나마도 대학생 때는 과일이 사치품이라 최우선으로 고려할 요소는 가격이었다. 동네 주민(모조리 대학생) 사정이 다 그러했으니 과일만 주로 파는 가게도 없었고 생겼다가도 금세 사라졌다. 아직 단골 과일 가게에 대한 로망은 가지고 있지만 지금 사는 동네에도 딱히 과일 가게라 부를 만한 곳이 없다. 이루지 못한 아쉬움을 메우기 위해서, 집에서건 여행길에서건 '맛있는 과일'이 있어 보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일단 들어가고 본다. 뭐, 과일 배는 항상 따로 있기도 하고.
여행을 하면서 과일을 살 때는 언제나 두 가지를 고려한다. 첫째, 여기서만 구할 수 있거나 여기라서 특히 맛있는 과일을 고를 것. 이미 아는 맛으로 배를 채울 여유는 없으니까. 둘째, 손 이상의 도구가 필요하지 않을 것. 물론 문명인이니까 포크나 젓가락이 있다면 사용하겠지만 절대로, 절대로 껍질을 깎아야 한다거나 입에 넣을 수 있는 크기로 썰어야 하는 과일은 사지 않는다. 여기에서 엄마와 나의 차이점이 두드러지는데, 여행 가방에 언제나 과도를 챙기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마와 여행을 가면 사과를 먹을 수 있다. 치아가 약해서 아삭, 하고 베어 먹을 수 없으므로 혼자서는 절대 사과를 사지 않는다. 달리 좋아하는 과일이 많아서 그립지도 않다.
칼이 없어서 포기한 과일 중에 아쉬운 것은 딱 하나, 파인애플이다. 하와이에 가면 돌Dole 농장에서 운영하는 파인애플 농장이 있다. 자동차를 렌트한 김에 오아후 섬을 돌아볼 생각이라면 중간에 들리기 좋은 곳이다. 도심지를 벗어나서 한참 달리는 동안 주변에 보이는 거라고는 왠지 불그스름한 밭뿐이라, 대체 파인애플은 언제 보이는 걸까, 아 저게 다 파인애플인가 생각하다 보면 도착하게 된다.
파인애플 농장의 주차장 옆에 붙은 작은 정원에 들어가면 나무가 아니라 풀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작은 바나나 싹, 분홍색을 띠는 작은 파인애플 같은 작물을 구경할 수 있다. 그리고 가게로 들어가면 파인애플 모양 인형이나 파인애플 모양 옷을 입은 곰 인형, 파인애플 농장 티셔츠를 입은 곰 인형, 하여튼 간에 파인애플 모양을 한 기념품은 전부 여기 모여있다. 왠지 모르겠지만 파인애플 농장 그림이 그려진 야구공을 선물용으로 하나 샀다.
그리고 매점에서 파인애플 주스를 부은 파인애플 아이스크림을 사면 파인애플 모양 컵에 담아서 준다. 신난다! 하고 빨대로 쭉 빨아들였더니 턱관절 근처가 아릴 정도로 달았다. 놀래라! 하지만 기념품 가게의 계산대 옆에 쌓여있는 생 파인애플을 보고 당도를 납득했다. 보통 한국 마트에서 파는 파인애플은 전체적으로 굵기가 일정하고 밑동이 날렵하다. 그런데 여기 진열된 파인애플은 전체적으로 누런 황금빛을 띠고 아랫부분으로 갈수록 굵어서 묵직하게 내려앉은 느낌이었다. 내일이면 발효되기 시작할 것 같은 상태랄까. 정말 심각하게 사고 싶었지만 일단 과도가 없었고, 아니 사실 파인애플은 과도가 아니라 식칼로 도려내야 하고, 칼까지 산다 치더라도 음식 쓰레기가 사과 껍질 수준이 아니고…… 결국 눈으로 스캔하듯이 노려보다가 돌아왔지만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맛있었겠지…
하지만 하와이에서는 어느 마트에 들어가건 딱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놓은 파인애플을 파니까 칼이 없어도 사서 먹을 수 있다. 파인애플뿐만 아니라 녹색 허니듀 멜론만 담은 것, 주황색 캔털롭 멜론만 담은 것, 수박만 담은 것, 멜론과 수박으로 삼색 과일을 모은 것, 파인애플까지 섞은 것, 온갖 선택지가 플라스틱 통에 담긴 채로 차곡차곡 쌓여 있어서 호텔로 돌아가기 전에 들러 하나씩 사기 좋다.
찍어 먹기 딱 좋게 깍둑깍둑 썰어서 네모네모하게 담아서 파는 과일들. 그런데 이 사각형 통들 사이에서 홀로 시선을 강탈하는 과일이 있으니, 파파야다. 하와이에서 파파야를 어떻게 담아서 판매하는지는 한 번쯤 볼 가치가 있다. 푹 익어서 과육이 주황빛을 띠는 파파야를 반으로 갈라서, 댕글댕글 새까만 구슬 같은 씨를 전부 파내고, 온갖 베리며 과일을 담아서 판다. 아주 작은 선물용 과일 바구니 형태로, SNS로 친다면 인스타그램에 최적인 모양이다(핀터레스트에서 파파야 보트를 검색하면 수두룩하게 나온다).
과일을 담지 않은 경우에는 라임이나 레몬 조각을 얹어 놓는다. 호텔 조식 뷔페에 가도 길게 조각낸 파파야에 군데군데 라임 조각을 얹어 둔다. 다니는 내내 파파야를 과일 담는 그릇처럼 쓰는 모습을 봤더니 모둠 과일 통조림에서 나타드코코(코코넛 즙을 우무처럼 굳힌 하얀 젤리형 과자) 다음으로 맛있는 것 정도로 생각했던 파파야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말았다. 언젠가 반드시 선물용으로 쓰고야 말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