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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주 Dec 18. 2018

가족 여행 평화롭게 다녀오는 법

료칸의 맛은 평화

자고로 가족 여행이란 의외로 예측불허의 고통이 수반되는 시간이 되기 쉽다. 멀리 갈 것 없이 나만 해도 그리 좋은 여행 동료는 아니다. 우선 몇 시에 하루를 시작하건 오후 세 시면 체력이 한 번 방전되고, 식비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엥겔 지수가 높은 스타일이며, 정 마음이 맞지 않으면 개별행동을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여행을 갔으면 눈을 뜬 순간부터 잠들 때까지 돌아다녀야 아쉽지 않고, 밥은 대충 먹어도 상관없으며(그럴 수가!), 여기까지 왔으니 단합해서 즐거운 경험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사명을 지닌 사람과는 극악의 궁합이다.


한데 이상한 점은 출장, 패키지여행, 자유여행을 막론하고 어떤 성격의 사람들과 여행을 가건 어느 정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적당히 타협해서 다닐 수 있는데, 묘하게 가족과 함께 있으면 사사건건 서운한 마음이 든다는 것이다. 객실 베개가 딱딱하다는 불평도 내 탓이라는 말 같고, 저녁에 괜히 한 방에 모여서 술 한 잔에 옛날 얘기를 들먹이다가 싸우고, 모두가 '적당하다고 생각할' 금액과 메뉴의 맛집을 찾느라 골머리를 썩이다 이것도 저것도 다 싫어지기도 한다. 그런 일 없다, 우리 가족은 행복하고 즐겁게 여행을 다닌다, 그렇다면 축하를 드리고 싶지만 누군가 한 사람이 고민을 끌어안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여하튼 가족 여행의 이러한 특성은 낯선 장소와 한정된 시간이라는 여행의 제한 조건 속에서, 가족 구성원끼리 평생 주고받은 인과(因果)가 증폭되기 때문이다. 요만큼만 서운하게 해도 그간 마음 상했던 비슷한 상황에서 겪은 갈등이 한 번에 치고 올라오는 것이다. 다들 조금만 불씨를 댕겨도 화르륵 폭발할 듯이 살짝 예민하고 피로한 상태인 것도 한몫한다. 그러다 보면 각자 자기 돈으로 음료를 사 마시는 상황에서도 유로로 적힌 네 메뉴 가격이 달러로 얼마인지 빨리 암산하지 못한다고 느닷없이 화를 내고 마는 것이다(명예를 위해서 말해 두지만 이건 내가 아니며 옆에서 보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상 가족 여행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다툼은 자연재해와 같아서, 평소에는 별 일 없이 사이좋게 지내더라도 갑자기 펑 터져 나오기도 한다. 있다고 비관할 것도 아니고, 없을 거라 무시할 일도 아니다. 딱히 무어라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없다면 각자 가족별 스타일에 맞춰서 되도록 큰 사단 없이 여행을 다니는 방법을 모색하는 편이 낫다.


그런 면에서 온천 료칸 가족 여행은 뜨끈한 노천 온천 외에도 평화로운 여행을 보장하는 요소를 또 한 가지 지니고 있다. 우리가 묵은 료칸의 기본 접객 모토가 슬플 때, 짜증 날 때, 피곤할 때 등 갖은 문제 상황에 대처하는 나의 해결 방식과 일맥상통했던 것이다. 바로 오로지, 주야장천, 계속, 잘 먹이기다. 도무지 마음과 뱃속이 허할 틈을 주지 않았다.



숯불에 팝콘을 튀기는 료칸


톱니바퀴 기계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시스템을 갖춘 호텔과 달리 료칸은 마치 살림을 꾸리는 가족이 매일 찾아오는 손님을 대접하는 느낌이 드는 곳이다. 때가 되면 마당에 뿌린 모이를 쪼아 먹으러 푸른 볏을 바르르 떠는 닭들이 사람의 발자국 사람 따위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뒤뚱뒤뚱 나타나고, 처마 아래에는 말랑말랑한 곶감과 묘하게 늘씬한 무가 달랑달랑 말라간다. 그리고 막상 차리는 모습은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때마다 여기저기에 간식이 등장한다. 마치 입은 하나니까 먹는 중에는 불평할 틈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은 사람들처럼. 우리는 삼 일간 음식이 평화에 한몫한다는 진리를 다시금 체험했다.


처음 호테이야에 '체크인'을 하면 작은 화롯가처럼 생긴 휴식 공간으로 안내를 받는다. 벽 근처에 놓인 네모난 나무 찜통의 뚜껑을 열면 찐 고구마와 찐 달걀이 보인다(아쉽게도 온천 달걀은 아니다). 껍질을 조물조물 벗겨서 뜨거운 달걀을 소금에 톡톡 찍어먹는 맛이란! 기차간은 아니지만 다다미 방에 둘러앉아서 수다를 떨기에 딱 어울린다. 자고로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한 숨 돌리면 마음이 편해지는 법으로, 이유식과 유아식 사이에 애매하게 낀 나이 때의 아가에게 간식 삼아 먹이기에도 제격이다.



정갈하면서 다채로운 가이세키로 저녁을 먹고 나서 어스름이 지며 더 고즈넉해진 화롯가에 앉으면 이번에는 타닥타닥 타오르는 숯불에 튀길 수 있도록 팝콘용 옥수수와 철망 체가 마련되어 있다. 작은 폭탄처럼 터지는 팝콘은 보통 1. 튼튼한 시판 봉투 팝콘을 전자레인지에 돌린다 또는 2. 냄비에 담고 불에 올려서 뚜껑을 닫는다는 방식으로 만든다. 뚜껑을 닫지 않았다가는 전신에 살벌한 팝콘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뚜껑을 닫으면 얼굴을 보호할 수 있지만 팝콘이 터지는 쾌감을 소리로만 느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그런데 철망 체에 팝콘을 튀긴다니! 운동회에서 콩주머니를 던져서 깨는 박을 시스루로 만들었다고 할까, 하여튼 성긴 뜰채를 두 개 붙여서 손잡이를 고정한 모양의 투박한 팝콘기에 옥수수를 담아서 숯불 위에 올리면 그 속에서 팝콘이 타다닥 튀는 모습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는 형태였다. 물론 자주 흔들어줘야 골고루 잘 튀겨진다. 영화관에서는 버터와 캐러멜에 치즈까지 뿌리지만, 이미 숯불과 팝콘 터지는 모습에 흥분한 사람들은 소금만 뿌려도 신나게 와작와작 먹어 치운다. 낮부터 있던 물병 옆에는 뜨끈한 이모 소주가 담긴 항아리 디스펜서(맥주 디스펜서 이후로 제일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소품이다)가 등장해, 이미 가이세키와 함께 사케를 홀짝인 주당들은 대포를 하나씩 손에 쥔다.


물론 료칸에 왔다면 아침저녁으로 틈날 때마다 온천에 몸을 담가줘야 하는 법이다. 만약에 발을 들인 곳이 우리나라 찜질방이라면 필수 음료는 뭐니 뭐니 해도 빨대를 꽂은 식혜! 하지만 호테이야 료칸에서 아침에 공용 욕탕을 이용하고 나면 유리병에 담긴 우유와 유리컵에 담아 마실 수 있는 요구르트가 시원하게 차려져 있다.


'규슈의 맛있는 요구르트, 기분 좋은 바람을 맞으며 드셔 보세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버금가는 유혹적인 문구다. 우유보다 조금 농후하고 살짝 단맛이 도는 새하얀 요구르트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옆 휴식처의 발 마사지 기계에 앉아 있을 수 있도록 공간을 꾸며 놓았다. 뜨끈한 온천에 시원한 우유로 하루를 시작하면 온종일 평화롭고 맛있는 시간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을까? 의문문인 이유는 별채 온천만 쓰느라 예쁘게 차려진 우유병은 조식을 먹기 위해 하오리를 걸치고 털레털레 걸어가는 길목에 집어 들었기 때문이다. 조식을 먹고 나서도 현지 우유는 고소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들 별채로 돌아와 드립으로 커피를 내리고 꼴꼴 우유를 부어 라테를 만들었다.


신기할 정도로 평화로운 가족 여행인데? 료칸이 큰 몫을 하긴 했지만, 사실 이건 정말로 잡음 없이 단란한 기억만 남기기 위해서 모두가 여행지 선정부터 최선을 다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버지 칠순을 축하한다는 목적에 부합할 것. 대인원에 노약자가 있어 이동이 쉽지 않으니 한 군데서 다양한 볼거리를 즐길 수 있는 곳을 고를 것.


다행히 근처 당고집에서 콩가루 당고를 판다는 말에 반색할 정도로 아버지에게는 일본식 가옥과 먹거리가 유년 시절 추억 거리였고, 옛날식 별채에 마당과 자연 소재로만 꾸며 놓은 료칸은 유난히 아기자기해서 지루할 틈이 없었다. 어쩌면 그간 다투면서 볼 장을 다 봐서 더 싸울 일도 없거나, 나이가 들고 자기 삶이 생기면서 쓸데없이 날을 세우지 않게 된 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먹이고 재우면서 제 역할을 다한 료칸 없는 곳으로 다시 떠나 봐야 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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