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 안 먹던 아침밥 먹기
내가 나를 보살피게 된 이후로 나는 아침밥을 먹지 않는다. 학창 시절에는 매일 엄마가 챙겨주는 아침을 먹고 다녔던 걸 생각하면 딱히 어린 시절의 식습관이 평생 그대로 자리 잡는 건 아닌 모양이다. 딱히 챙겨 먹는다고 속이 부대끼는 것도 아니라 지금도 누가 주면 먹기야 먹지만, 나를 포함해서 누군가의 노동력을 갈아 넣어야 할 정도로 아침밥이 중요한 식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밥을 먹겠다고 부산을 떠느니 조금이라도 더 자고 차분하게 하루를 시작하는 편이 낫다. 여행을 떠나서도 아침밥에 대한 생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휴가에 아침잠을 설치면서까지 하고 싶은 일이라고는 오로지 출발하는 새벽 비행기 타기 밖에 없다. 그때는 새벽 세시라도 일어날 수 있지만 정말 여행 중간에는 일찍 일어나고 싶지 않다. 몽롱한 정신으로 아침 햇살을 쬐면 우수에 찬 붉은 노을을 마주할 때보다 더 큰 회의감에 빠진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놀러 와서도 이 시간에 일어나고 있지? 쉬러 와서 카페인으로 잠을 깬다면 출근하는 날과 뭐가 다른가? 일찍 일어나는 새는 피곤해서 입맛이 없다고. 일단 좀 자자.
문제는 아침 식사란 주로 매력이 철철 넘치는 메뉴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그 악명 높은 영국 요리에서도 아침 식사(풀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는 맛있다고 할까. 팬케이크, 잉글리시 머핀, 베이컨, 오믈렛, 오트밀, 버터와 꿀과 잼. 어린 시절에 침을 삼키며 봤던 영미 문학 속 로망의 음식도 대체로 아침 식사 메뉴였다. 모처럼 늘어지게 잠을 잘 것인가, 달콤하고 짭짤하고 질척거리는 아침식사를 할 것인가? 이런 갈등에 빠지는 사람을 위해 빅토리아 시대부터 탄생한 단어가 있으니 바로 브런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주로 아침 식사 메뉴로 구성된 데다 슬슬 낮술까지 가능하다는 마성의 매력을 지닌 브런치는 아마 향후로도 퇴화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게으르지만 아침밥은 먹고 싶은 굼벵이들의 역사 깊은 반항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눈꺼풀이 무거운 여행자를 침대에서 굳이 어떻게든 끌어내고 싶다면 어지간한 아침밥보다 매혹적인 메뉴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궁극의 아침 식사, 그러니까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한' 조식 뷔페쯤은 되어야 한다.
모순과 애증 덩어리, 조식 뷔페
행복한 아침 식사의 나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조식 뷔페, 나를 새벽부터 기꺼이 일어나게 만드는 드문 존재인 조식 뷔페를 모순 덩어리라고 투덜거리는 것 역시 수면 부족으로 인한 애증이 끓기 때문이다. 여행에는 여러 스타일이 있는데, 특히 심신이 지쳐서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을 때는 유적지도 관광도 다 필요 없고 남이 청소해 준 방에서 바삭바삭하게 마른 하얀 침구를 끌어안고 뒹굴다가 조식 뷔페나 먹고 하릴없이 노니는 호텔 바캉스, 일명 '호캉스'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오로지 휴식과 한가로움으로 점철된 한껏 게으른 휴가 계획에는 곧잘 조식 뷔페가 필수 요소로 따라붙는다. 늘어지게 자다가 어디 가서 뭐 먹지 복잡하게 머리 굴릴 것 없이 느긋하게 내려가서 조식 뷔페나 먹고 싶다. 뭐 이런 정도의 감각이다.
그런데 막상 커피와 우유가 흐르고 빵이 샘솟는 조식 뷔페에 가려면! 한갓지게 잘 틈 없이 눈을 비비면서 일어나야 한다. 아니, 나만 이렇게 잠에 집착하나? 하지만 정말 대체로 길어 봤자 9~10시경이면 조식 뷔페는 문을 닫는다. 그쯤이면 느지막이 일어나서 갈 수 있을 법도 하지만 각다귀 떼가 쓸고 간 듯이 초토화된 뷔페에 뒤늦게 들어 가느니 브런치나 점심을 기다리는 편이 낫다. 이쯤 되면 사실상 조식 뷔페보다 룸서비스 쪽이 진짜 호캉스의 로망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쉬는 날에 새벽같이 일어나야 한단 말인가? 그래도 군말 없이 일어나서 찾아가는 걸 보면 나에게는 조식 뷔페가 룸서비스보다 부귀 영화인 게 틀림없다.
조식 뷔페가 사실 여유나 한가로움과는 거리가 있다는 건 지난 여행만 되짚어봐도 증명할 수 있다. 실제로 조식 뷔페를 제일 열심히 먹었던 건 자다 깨서 렌터카를 타고 마트에 가거나 인피니티 풀에서 노닥거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괌에서의 호캉스가 아니라, 휴가가 단말마 수준인 한국인답게 매일 호텔을 바꿔가며 동유럽을 돌아다니는 패키지 투어에 엉겁결에 참여했을 때였다. 부모님의 부부동반 모임에서 몇 년에 한 번씩 추진하는 해외여행에 따라붙게 된 것인데 이럴 때는 몸과 지갑이 편한 대신 주로 매일 새로운 호텔의 와이파이 잡아 드리기, 오늘의 일정 숙지해서 물어보시면 대답하기, 사진 찍어 드리기 등의 임무를 담당하게 된다. 사실 혼자서는 털레털레 먹으러 돌아다니기나 하는 저질 체력을 지닌 사람으로서 이렇게 억지로 버스에 태워서 끌고 다니지 않으면 단시간에 여러 명소를 찍을 일이 없기 때문에 패키지여행도 나름대로 좋아하는 편이다. 마치 다음에 혼자 다시 올 곳을 정하는 예고편을 보는 듯한 기분으로 다닌다.
여하튼 그렇게 열흘간 동유럽을 돌면서 정말 아침마다 다른 조식 뷔페를 먹었다. 어째서인지 콘셉트가 헤밍웨이라서 각 작품별 모티브를 따로 장식한 오브제가 인상적이었던 곳, 무순을 모종째로 차려서 직접 가위로 잘라 수확해 먹게 만들어 놓은 곳, 별다를 것 없어 보였는데 몽글몽글한 스크램블 에그가 지금까지 먹어본 중 제일 맛있었던 곳. 매번 처음 보는 커피 머신 앞에서 새롭게 작동법을 파악하고, 한 번도 겹치는 일 없는 버터 포장지를 구경했다. 매일 진지하게 제일 부드럽고 담백한 빵을 골라서 처음 보는 햄과 치즈를 끼워 햄 치즈 샌드위치를 만들고, 잼처럼 1회분씩 포장한 꿀을 요구르트에 붓고, 라테 잔이 예쁜 곳에서는 아메리카노 대신 라테를 마셨다.
이상적인 조식 메뉴
조식 뷔페는 모순 덩어리라고 투덜거렸지만, 쫄랑쫄랑 걸어 들어가는 내 마음속도 모순투성이이기는 마찬가지다. 이걸 설명하려면 우선 조식 뷔페의 탄생부터 짚어 보아야 한다. <아침식사의 문화사>를 보면(이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얼마나 재미있게 느껴지는가에 따라서 본인이 얼마나 아침 식사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나는 1부터 10 가운데 9.7 정도가 된다) 고급 호텔에서 뷔페식 아침 식사를 도입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부터다. 그런데 그전까지는 대체로 다들 아침 식사를 거하게 차려 먹었기 때문에 오늘날 기준으로는 뷔페식이라고 여겨질 만한 상차림이 1890년대에는 당연한 것이었다고 한다. 대체 얼마나 먹었기에? 설마 하니 양이 아니라 가짓수를 일컫는 말일 것이다. 기원이 이러할진대 뷔페에서 배부르게 아침을 먹는 것은 전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뷔페에 왔다고 꼭 배 터지게 먹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또 언제나 절제만이 미덕인 것은 아니니까.
그런데 가끔씩 새벽부터 이미 비즈니스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 입고 작은 트렁크를 끌고서 한두 접시만 차분하게 가져다 먹고 쏜살같이 나가는 사람을 보면 왠지 멋지게 느껴진다. 나도 저렇게, 좋아하는 것만 요만큼 먹고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만 도무지 쉽사리 그렇게 되질 않는다. 어슬렁어슬렁 한 바퀴 돌면서 구경하다 보면 좋아하는 거 담고, 신기한 거 담고, 옆 사람 담는 거 따라 담고, 좋아하는 거 한번 더 먹고, 위장에 대한 죄책감에 샐러드도 조금 담고… 이상과 현실의 괴리다.
하지만 시행착오를 거듭하면 언젠가는 깨닫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그간 물량 공세가 특징인 조식 뷔페를 신나게 섭렵하면서 어느 순간 내가 제일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아침 식사 메뉴가 무엇인지 파악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양은 타협하지 못하지만 '좋아하는 것만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나 할까?
이제 좋아하지도 않는 익히지 않은 채소(양상추, 양상추, 양상추)를 염소처럼 뜯어먹는 일은 없다. 대신 어지간하면 있는 스크램블 에그를 반드시 먹는다. 가는 곳마다 형태가 다른 스크램블 에그는 엄청 단순한 음식이라 오히려 차이가 확실하게 느껴진다. 큼직큼직하게 덩어리 져서 수분감이 떨어지기도 하고, 몽글몽글해서 반 정도는 오트밀처럼 보이기도 한다. 학교에서는 정통 프랑스식으로 쉴 새 없이 저어 중탕으로 크림처럼 부드럽게 만드는 방식을 배웠지만, 내가 좋아하는 아침 식사용 스크램블 에그는 바닥에 달걀물이 고이지 않고 적당히 형태가 잡혀서 단단하지만 퍼석하지 않은 미국식이다. 큼직한 숟가락으로 반 접시 정도 퍼서 토마토케첩을 살짝 뿌리고 포크로 숨도 쉬지 않고 먹고 싶다.
그런 다음 크로와상 계열의 빵을 오븐 토스터에서 따뜻하게 데운다. 버터 향이 물씬 피어오르고, 쳐다만 봐도 푸슬푸슬 부스러기가 떨어져서 절대 깔끔하게 먹을 수 없는 발효 퍼프 페이스트리다. 그런데 만약에 크로와상 대신 초콜릿 바를 넣은 팽 오 쇼콜라나, 그보다 존재 자체로 사랑받아 마땅한 팽 오 레쟁이 있다면 나는 그날 하루 종일 어떤 일에도 불평을 쉽게 늘어놓지 않을 것이다.
팽 오 레쟁은 크로와상처럼 발효 퍼프 패스트리에 커스터드 크림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 노란 크렘 파티시에르를 바르고 통통하게 불린 말랑한 건포도를 잔뜩 넣은 다음 돌돌 말아서 달팽이 집 모양으로 잘라 구운 것이다. 초승달 모양이라 필연적으로 가운데는 통통하고 속이 촉촉하며 양쪽 끝 부분은 바삭한 크로와상과 달리 동글동글한 팽 오 레쟁은 한 입마다 맛이 일정하고, 달콤하고, 바삭하면서 부드럽고, 결정적으로 아침부터 나의 강박증을 만족시켜서 오늘 하루도 완벽할 거라는 암시를 준다.
그렇다. 나는 아무도 보지 않으면 롤케이 크나 바움쿠헨을 바깥쪽부터 돌돌돌돌 한 겹씩 벗겨 먹는 사람이다. 한 입 먹을 때마다 음식을 비슷한 비율로 반복해서 배분하는 행동에 속절없이 끌린다. 그냥 숭덩숭덩 베어 먹는다고 안절부절못하지는 않지만 끝까지 순서대로 먹고 나면 만족감이 충족되면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묘한 강박증이다. 바삭한 껍질과 부드러운 속살, 바닐라 향의 노란 크렘 파티시에르, 달콤하고 진득한 건포도를 끝까지 완벽하게 배분해서 먹은 다음 커피 한 잔을 마시면 조식 뷔페가 제공할 수 있는 최대한의 행운을 만끽한 느낌이다.
물론 이렇게 마음에 쏙 드는 이상적인 아침 식사 구성을 발견하고도 아직 여기 베이컨은 바싹 구웠을까, 두꺼울까 얇을까 기웃거리다가 한 조각 덜어 먹고 과일 3종에 수프까지 탈탈 털어야 부른 배를 잡고 터덜터덜 방으로 돌아가기 일쑤이니, 아직 초연한 뷔페 손님이 되기는 요원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