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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주 Dec 25. 2018

그림 미식 여행 도전기

하코다테에서 먹고 그리기

"여행은 빚내서 가야 해. 돈 모이면 가야지, 하면 천년만년 지나도 못 가."


고등학교 시절 영어 선생님이 뜬금없이 여행에 대한 조언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요컨대 자금을 되는 대로 박박 긁어모아서 다녀온 다음에 채울 생각을 해야지, 여행을 가겠다고 목돈을 모으려 들지 말라는 뜻이었다. 빚과 대출에 대해 별 생각도 없지만 좋은 인식도 없는 고등학생들이 웅성거리자 그제야 선생님은 교무실에서 몇몇이 모여 여행 계를 들었다가 어느 정도 모인다 싶으니 누구는 냉장고를 바꾼다, 누구는 이사를 간다며 하나둘씩 지분을 나누어 받고 탈퇴해서 결국 여행이 무산되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반쯤 하소연이었던 셈이다. 빚을 낼 필요는 없지만 뭐든지 여유가 생길 때까지 기다리느니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밀어붙여야 달성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다만 여기서 여유분이란 영어 선생님의 의견처럼 자금이 아니라, 시간이다.


그림 여행은 불발?


몇 해 전, 기적처럼 친구들과 홋카이도로 여행을 다녀왔다. 어떤 부분이 기적이었는가 하면 일단 모두 같은 날짜에 시간을 낼 수 있었다는 점이다. 대체 어떻게 프리랜서인 네 명이 동시에 쉴 수 있었는지 지금도 신기할 따름이다. 이제는 정말로 서울 인근에서 다 같이 얼굴이나 한 번 보려고 해도 날짜를 맞추다 보면 다음 주, 다음 달을 넘어서 다음 계절로 넘어가기 일쑤이니까. 거의 하늘이 돕고 땅이 도와야 가능한 만남이다.


마음 맞는 여행 친구는 귀한 존재다. 다 같이 능동적으로 여행 계획을 짜고, 누구 하나 서로에게 강요하지 않고, 본인이 말한 건 지키고, 나중에 딴 소리 안 하고, 무엇보다 입맛이 비슷하고 돈 쓰는 규모와 방식이 비슷해야 한다. 소소하게는 여행을 하다 보면 중간중간 크고 작은 시간 여백이 많이 남기 마련이니 수다를 떠는 스타일이 달라도 피곤하다. 가끔 밖에서 만나는 정도로는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어도 나중에 이렇게 하면 되지, 이건 나 혼자 하면 되지 하고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시간과 기회가 한정적인 여행에서는 아깝고 피곤한 만큼 속이 평소보다 더 좁아지니 마련이다. 그렇게 날 세울 일 없는 여행 친구란 얼마나 소중한가.


대학 동기인 우리처럼 지방에서 올라와 몇 년 동안 같은 고시원이나 이웃 자취방을 전전하면 오히려 고등학교 친구들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다. 싸구려 와인을 퍼마신 다음날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붙들고 해장죽을 끓여 달라고 굴러들어 오고, 시험이 끝나면 같이 보러 갈 영화를 심혈을 기울여서 고르고(돌아온 <킹콩>이었다), 동네 슈퍼에서 귤을 반값 세일하는 날을 문자로 공유하고, 좋은 생각도 나쁜 생각도 서로 이야기하면서 반쯤 자매처럼 큰다. 그러다 어찌어찌 각자 먹고살 길을 찾으며 십 년쯤 부대끼고 나니 큰일도 먼지처럼 사소한 일도 세상 제일 잘 알고 있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서로의 전 남자 친구 이력과 약한 병력까지 꿰고 있는 친구들과 여행을 가는 김에 꼭 해 보고 싶은 일이 있었다. 바로 미식 여행 겸 그림 여행이다.


내가 취미 삼아 그림에 손을 대게 된 것은 평생의 사랑인 음식에 대한 애정을 표현할 또 다른 방도를 찾기 위함이었는데, 기본적으로 쓱쓱 빠르게 그리기보다 차분하게 선을 긋고 색을 칠하기 위해 눈으로 음식을 뜯어보며 소소한 디테일을 깨닫고 상념에 빠지는 과정을 매우 즐긴다. 예를 들어 평생 먹기만 하던 김치를 처음으로 직접 담가 보면 그 모양과 형태와 맛을 개별적으로, 그리고 다시 복합적으로 꿰뚫어 볼 수 있게 된다. 싱싱한 배추가 소금에 절면서 생기는 변화, 매 장마다 혹은 두어 장마다 바르는 김치 소, 켜켜이 맛이 배어들게 만들려면 반드시 필요한 손길. 김치를 보시기째 먹기만 할 때와 김장하는 과정을 옆에서 관찰할 때, 그리고 직접 담가 보았을 때 저마다 김치를 받아들이고 느끼는 깊이가 달라진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순간, 지금껏 나는 이 음식을 제대로 보고 있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보다 느리게 손을 움직이며 무심코 지나쳤던 부분을 발견하고, 장식의 개수와 위치를 확인하며 셰프의 의도를 생각한다. 돌돌 말린 빵의 곡선을 눈으로 훑으면서 반죽하는 손의 움직임을 되새긴다. 관찰하는 속도가 느려진 만큼 머릿속을 지나가는 생각의 속도는 빨라진다. 좋아하는 음식일수록 꼭 한 번 그림으로 그리고 싶어 진다.


다만 이러한 스케치 특성상, 여유롭고 감성적인 여행의 대표 격처럼 여겨지는 '즉석에서 그림을 그리는 여행'은 하기가 어렵다. 먹기 전에 잠깐 사진을 찍는 시간마저 타박을 듣는 마당에 색을 칠하면서 그림을 그릴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나부터도 맛있는 음식을 눈앞에 두면 그림을 그리기보다 일단 입에 넣고 싶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사진을 찍은 다음 열심히 먹는 것이다. 마음껏 맨눈으로 관찰하며 그릴 수 있는 음식은 빵 정도다. 기실 미식 여행과 그림 여행을 양립하는 요령이 아직 서툰 탓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더욱 그림을 업으로 삼은 친구와 함께하는 김에 그림 여행을 시도해보고 싶었다. 맛있는 음식도 먹어야겠고, 그림을 그리고 싶을 정도로 풍경도 예뻐야겠고, 다들 걷는 것을 좋아하니 도보로 이동하기 쉬워야겠고, 그러기에는 여러 모로 홋카이도만 한 곳이 없었다.



때는 청명한 11월, 눈이 소복소복 쌓일 만큼 춥지도 않고 낙엽이 안 그래도 예쁜 하코다테 시를 알록달록하게 물들고 있는 시기다. 우리는 전날 인천 공항에서 산치토세 공항을 거쳐 삿포로 역에서 신칸센을 타고 네 시간 동안 달려 종일 이동만 한 끝에 하코다테에 도착한 참이었다. 홋카이도는 생각보다 넓어서 기차나 차를 타지 않으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없지만, 일단 도착하면 어디든 적당히 걸어 다니면서 구경하기가 좋다. 특히 요코하마나 나가사키와 함께 제일 먼저 서양에 문호를 개방한 하코다테는 서양식과 일본식을 절충한 독특한 형태의 주택이 이어지는 야트막한 언덕길 아래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풍경 덕분에 일본에서도 촬영지로 인기가 높은 지역이다.


아침부터 그림 도구와 카메라를 짊어지고 관광을 나선 우리는 아카렌가 창고 광장 중에서도 목조 건물에 자리한 스타벅스에서 원기를 충전하고서 파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딱히 길 잃을 걱정이 없는 격자 모양 거리를 따라 발 닿는 대로 하치만자카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전형적으로 생활감은 떨어지지만 눈 닿는 곳마다 그림처럼 아기자기한 관광지였다. 추적추적 내린 비에 젖은 낙엽이 콜라주처럼 달라붙은 계단도 예쁘고, 아래층은 일본식이고 위층은 서양식인 묘한 느낌의 건물 사이로 장미 송이가 엿보이고, 어째서인지 돌담 틈새로 민트가 싱싱하게 피어 있었다. 뒤를 돌아보면 바다가, 앞을 올려다보면 파스텔 톤의 푸르고 노란 공회당이 언뜻 보였다. 이쯤 되면 그림 여행으로 최적인 곳 같지 않은가?



그럼에도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림 여행은 반쯤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눈 돌아가는 곳마다 예쁘고 신기한 탓에 두 웹툰 작가를 포함한 모두가 쉴 새 없이 카메라로 자료사진을 남기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스마트 기기의 폐해! 디지털화되고 마는 추억들! 색 바랠 일도 없는 바이트로 이루어진 사진들! 하지만 여기까지 들고 온 그림 도구를 무용지물로 만들 수 없었던 우리는 사명감을 가지고 앉아서 그림을 그릴 만한 곳을 찾아냈다. 언덕길 꼭대기 즈음에 버티고 선 구 하코다테 구 공회당 건물 앞의 작은 벤치였다. 서양풍으로 지은 2층짜리 목조 건물로 푸른색 바탕에 노란 창문이 어우러지고, 작은 정원 바닥에는 각기 다른 색으로 물든 낙엽이 떨어져서 생긴 그라데이션이 선명했다. 시간도 거의 저녁에 가까워져서 마치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 같았다. 벤치에 옹기종기 앉은 우리는 각자 스케치북을 꺼내서 마음 가는 대로 드로잉을 남겼고, 그림 대신 사진에 취미가 있는 친구는 우리가 마치 평생 동안 그림 여행만 다닌 사람처럼 보이는 사진을 찍어줬다. 확대 해석을 조장하는 증거 남기기에도 손발이 딱딱 맞는 사이인 셈이다. 여하튼 이렇게 여행길에서 그림 한 장은 무사히 남겨올 수 있었다.


미식 여행으로 노선 변경


비록 그림 여행은 알록달록한 추억 하나만 남기고 흐지부지 되었지만 미식 여행은 나름대로 순항을 이어갔다. 나는야 대쪽 같은 기개를 지닌 습관과 집착의 동물이라 내버려두면 평생 좋아하는 음식만 백 번씩 먹다가 새로운 걸 먹을 끼니를 놓치며 살 위험이 높지만, 미묘하게 다른 서로의 취향을 꿰고 있는 사람들과 여행을 다니면 평소에 안 하던 짓도 하고 남 먹는 것도 구경하면서 경험치를 두세 배로 쌓게 된다. 그리고 나 못지않게 식료품 선반을 샅샅이 훑어 대는 친구들과 함께하니 마치 눈과 손이 네 쌍으로 늘어난 기분이었다. 편의점에서 항상 마시는 립톤 밀크티를 집어 들고 돌아서니 친구 1이 처음 보는 포도 젤리를 권하고(이후 이 젤리는 SNS상에서 머스트 헤브 아이템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잘게 썰어서 불리기만 하면 여기저기 쓰기 좋다는 다시마를 사서 나오니 친구 2가 한 뼘 만한 유바리 멜론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아사이치 시장에서 처음 시식한 샤인 머스캣 포도에 반해서 2만 원에 육박하는 가격을 지불하고 한 송이를 샀더니 옆에서 친구 3이 개별 진공 포장한 간장 절임 관자를 맛보고 주워 담고 있었다(뒤늦게 먹어본 우리는 다음날 가서 추가로 구입했다). 참으로 효율적이고 배부른 쇼핑이 아닐 수 없다.



그뿐인가? 기본적으로 강제 메뉴 통일 없이 겹치면 겹치는 대로, 전부 다른 거 먹고 싶다면 또 그러자는 대로 주문하는 사람들이라 어딜 가든 궁금한데 내가 사 먹을 것까지는 아닌 음식을 먹는 친구가 꼭 하나씩은 있다. 라멘집 '아지사이'에서 내가 시오 라멘을 먹으며 이건 너무나 내 고향 부산의 돼지국밥 냄새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친구 1은 달콤한 소스를 끼얹은 바삭바삭한 돈가스를 올린 미소 라멘을 먹고 있었다. 산책 끝에 발견한 경양식집 '고토켄'에서는 통통한 정통 오므라이스와 일본풍 소스를 끼얹은 햄버그 스테이크를 구경하면서 게살 크림 고로케를 얹은 고토켄 특선 커리를 먹었다. 아사이치 시장에서 반드시 먹어야 한다는 해산물 덮밥을 찾아 '키쿠요 식당'에 들어갔을 때는 과연 얘들이 뭘 주문할지 진지하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단무지에 미소시루, 해산물 덮밥이라는 단순한 구성 때문에 오히려 각자의 성격이 드러나기 쉽기 때문이다. 과연 어떤 해산물을 몇 개나, 어떤 조합으로 얹을 것인가? 좋아하는 것만 잔뜩 먹기 위해 고심하다 성게알과 생새우만 고를 것인가, 좋아하는 관자와 성게알에 왠지 궁금한 연어알을 추가할 것인가, 이왕이면 화려한 6종 세트로 전부 하나씩 먹을 것인가? 내가 확실하게 맞출 수 있었던 건 어쨌든 똑같은 걸 시키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거라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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