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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주 Feb 26. 2019

집에서 중화식 냉면 먹기

여행 중에도 일하는 프리랜서를 달래주는 음식

여행에는 절대 노트북을 가져가지 않는 것이 내가 세운 규칙이다. 출퇴근 없이 아무 때나 일을 할 수 있는 프리랜서는 잘못하면 출퇴근도 못하고 아무 때나 일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번역하기, 칼럼 쓰기, 남의 원고 취합하기 등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지만 적어도 노트북으로 몰입해서 해야 하는 일만큼은 여행지까지 가져가고 싶지 않다. 그래서 출발 전날 밤을 새우는 한이 있더라도 전부 처리해서 거래처에 보내고 부재를 알린 다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하지만 그래도 일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스마트폰으로 메일을 확인하고 PDF를 받아서 보고 메신저로 업무 지시가 날아오니까. 핸드폰과 호텔 비즈니스 센터의 조합이면 못할 일이 없는 스마트한 세상이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아리송하지만 덕분에 그나마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으니 좋게 생각하도록 하자.



그날도 두 달간 벼르고 별러서 준비한 휴가를 떠나기 바로 전날에 역자 교열 요청이 들어왔다. 양해를 구하고 일정을 조금 미루었지만 그래도 꼼짝없이 하루 네다섯 시간은 호텔 방에 들어앉아 작업을 해야 가능한 분량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장소는 맨날 가는 도쿄였고 나는 원래 일찍 들어와 방에서 쉬는 것을 좋아하며, 결정적으로 생산적인 일을 매일 적당히 하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기 때문이다. 이렇게 놀아도 되나! 정신 놓고 있다가 도낏자루 썩어서 도태되고 마는 것이 아닐까! 뭐 이런 잡생각을 여행 중에 할 일이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육아와 일을 병행하게 된 이후로는 오직 내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순간이 오히려 쉬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일하는 흐름을 끊지 않기 위해서 외식을 매일 한 끼씩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작은 호텔 방 안에서 어떻게든 효율적인 작업 공간을 창출한 다음 커피 두 잔과 함께 먹을거리를 사서 올라와야 했다. 뭘 사야 먹다가 서글퍼져서 다 때려치우고 뛰쳐나오는 사태를 막을 수 있을까? 고민 끝에 고른 음식으로 삼일 내내 저녁을 때웠다. 바로 중화식 냉면이었다.


히야시 츄카冷やし中華라고 불리는 중화식 냉면은 맛도 이름도 중국음식 같지만 사실 일본의 중국요리점에서 만든 음식이다. 원조가 어디냐는 논쟁은 두세 가지 갈래로 나뉘지만 모두 적어도 1930년대 즈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 깊은 음식이다. 기본적으로 노란 중국식 면에 간장 식초 국물을 붓고 오이, 햄이나 차슈, 달걀지단, 붉은 생강절임 등 색색의 고명을 얹어서 비벼 먹는다. 국물을 맛보면 우리나라 중국집에서 군만두를 먹기 위해 옆에 놓인 간장과 식초, 라유, 물을 섞어 즉석에서 제조한 소스와 비슷한 향수가 느껴진다.


무더운 한여름이면 그저 국수나 한 그릇 후루룩 말아먹는 것이 최고다. 멸치 국물을 내느라 푹푹 찌는 냄비 앞에 서 있어야 하는 뜨거운 국수가 아니다. 냉우동이나 냉모밀 같은 달콤 짭짤한 쯔유 기반의 일본식 냉국수나 매콤 달콤해서 정신이 확 들게 하는 한국식 비빔국수가 제격이다. 그리고 여기에 새콤 짭짤한 중국식 냉면이 한몫 거든다. 더위와 거친 에어컨 바람에 찌들어서 잃어버린 입맛을 확 끌어올려주는 간장과 식초 맛이 일품이다.


보통은 일본의 중화요릿집에 가면 콩국수처럼 '중화식 냉면 시작했습니다'라는 문구가 여름의 시작을 알린다. 그런데 이것을 호텔 방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저녁마다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편의점 덕분이다. 다양하고 (가격 대비) 맛있기로 소문난 일본의 편의점 음식은 정말이지 얄밉도록 온갖 메뉴를 섭렵한다. 샐러드, 도시락, 온갖 차에 반찬과 과자. 얼마 전에는 '광어 지느러미' 부분만 모아서 파는 초밥도 봤다. 각 메뉴에 맞춰서 용기도 얼마나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는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가 없다. 중화식 냉면은 면과 소스 봉지가 아래, 각종 고명이 위에 구역별로 나뉘어 담겨 있는데, 손가락 하나가 딱 들어가는 빈틈에 손을 넣어 위아래를 분리하게 되어 있었다.


소량씩 색색깔의 구성을 맞춘 고명은 반쪽짜리 반숙 달걀과 달걀지단, 오이채, 햄, 목이버섯, 숙주, 붉은 생강절임 등이었다. 아래칸의 면 위에 고명을 얹고 소스를 부어 버무리면 끝이다. 코가 찡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어서 별첨된 겨자는 넣지 않았다. 상큼하고 짭짤하고 나름 씹히는 것도 많아! 삼 일간 먹은 중화식 냉면은 세 그릇,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다섯 잔. 에어컨 나오는 호텔방에 갇혀서 일하는 기분이었지만 손만 뻗으면 먹을 수 있는 식사와 간식거리가 맛있어서 그리 나쁘지 않았다.



입맛 없어 괴로운 여름날에 만들기 좋은 냉국수 레퍼토리가 부족하다면 중화식 냉면을 추가해보자. 매워서 다음 날 화장실에서 고생할 일도 없고, 소스를 미리 만들어 두면 재빨리 면을 삶는 것 외에는 불을 쓸 일이 없다. 정식으로 만들려면 차슈를 넣지만 햄을 넣어도 무난하게 맛있다. 달걀지단, 오이, 목이버섯 모두 있으면 맛있고 없으면 넣지 않아도 무방하다. 하지만 생강 절임! 하얗건 빨갛건 생강 절임은 어떻게든 넣자. 맵싸하게 아린 맛이 식욕을 돋운다. 호로록호로록. 그래도 역시 편의점에서 사다 먹는 게 제일 편하겠지. 마감할 것 있을 때마다 일본 호텔에 처박히고 싶다.


중화식 냉면


재료(1인분)

중국식 생면(또는 중면) 1봉, 중화식 냉면 양념(아래), 오이 1/3개, 토마토 1/2개, 달걀 1개, 햄 2장


중화식 냉면 양념 재료

간장 1큰술, 식초 1큰술, 맛술 1작은술, 설탕 2작은술, 물 2작은술, 참기름·생강즙 약간씩


만드는 법

1 간장, 식초, 맛술, 설탕, 물을 소형 냄비에 담고 한소끔 끓인 다음 참기름과 생강즙을 더하여 빠르게 섞어 차갑게 식힌다.

2 오이와 햄은 채 썬다. 달걀은 잘 풀어서 얇게 부친 다음 가늘게 썰어 달걀지단 채를 만든다. 토마토는 적당한 크기로 썬다.

3 중국식 생면 또는 중면을 봉지의 안내에 따라 삶은 다음 얼음물에 식혀서 물기를 제거한다.

4 그릇에 면을 담고 고명을 얹은 다음 차갑게 식힌 양념을 뿌려서 버무려 먹는다. 취향에 따라 연겨자와 생강절임 등을 곁들여도 좋다.


* <온갖 날의 미식 여행> 단행본이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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