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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주 Feb 19. 2019

돈가스 대신 슈니첼 만들기

여행을 다니다 보면 다시 오고 싶은 곳이 있다. 이유는 가지각색이다. 분명 이곳을 좋아할 누군가가 떠오르면 함께 오고 싶다. 때로는 바쁘게 스쳐 지나간 것이 아쉬워서 여유롭게 돌아보고 싶다. 맛있는 음식을 다시 먹고 싶기도 하고, 여행자가 아닌 신분으로 살아보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니 당연히 머물고 싶은 기간도 천차만별이다. 식사 한 끼에 커피 한 잔이면 세 시간, 새벽길을 걷고 늦은 저녁까지 놀고 싶을 때는 일주일, 천국처럼 살고 싶을 때는 평생. 곰곰이 다시 찾아와서 하고 싶은 일들을 머릿속으로 그리다 보면 다음 방문의 견적(?)이 잡힌다. 그에 따라 수도 없이 풀방구리 쥐 드나들 듯 찾아가는 도쿄 같은 곳과 조용히 이민을 알아보면서 복권을 사게 만드는 하와이 같은 곳으로 나뉘는 것이다. 그중에서 유일하게 딱 한 달만 살아보고 싶은 곳이 있었으니, 바로 오스트리아의 잘츠캄머굿이다.



낮까지는 심하게 날씨가 좋던 어느 날, 놀이공원 어트랙션 같은 관광 코스가 숨어 있는 할슈타트 소금 광산을 가기 전에 모차르트의 어머니가 살았다는 장크트길겐을 찾아갔다. 절벽이 아름다운 산세와 동화 같은 마을에 둘러싸인 볼프강 호수가 반짝이는 곳이었다. 유람선을 타고 호수를 가로지르는 옆에서 누군가는 절벽을 타면서 클라이밍을 하고, 유유히 카누를 타고 흘러가다 수영을 했다. 고개를 빼고 높은 산마루를 바라보니 <사운드 오브 뮤직>에 등장한 길을 따라 개미처럼 작게 보이는 기차가 허위허위 산을 타고 있었다. 귓가에는 뱃전에 부딪히는 물소리가 찰랑였지만 머릿속에는 기차 소리가 들렸다.


길겐 마을이 가까워질수록 볼프강 호수를 바라보며 드문드문 늘어선 집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호숫가에 얼마나 가까운지, 안개가 끼면 틀림없이 창문을 열자마자 방안으로 물기운이 밀려들어갈 것 같았다. 건물 벽은 부활절 달걀처럼 노르스름하고, 창문가에 제라늄이 피어 있었다.


그때의 심정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이상한 말이지만 미처 생각할 틈도 없이 생각이 밀려들어왔다. 한 달만, 딱 한 달만 저 방에 머무를 수 있을까? 노트와 펜만 들고 찾아와서 아침이면 창문을 열고 호수를 바라보고, 오후 내내 호숫가를 거닐고, 저녁이면 물소리를 들으면서 잠들면 안 될까? 바닷가에서 자란 탓에 호수는 낯선데, 파도가 치지 않는 새벽의 호수에서는 무슨 소리가 날까? 한 달 후면 질릴까? 이렇게 잔잔한 풍경에 질릴 수만 있다면 오히려 다행이지 않을까?


어째서 한 달이라는 기간을 떠올리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냥 그 정도만 바라야 할 것 같았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그린 게이블스에 살게 된 빨간 머리 앤처럼 호수와 나무에 멋대로 이름을 붙이면서 돌아다닐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곳저곳이 너무 예뻐서 마음이 벅차고, 반나절만 있다가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한숨이 밀려오면서 눈과 다리가 바빠졌다.


이 곳에서 먹은 점심이 슈니첼이다. 이름이 예쁜 유럽식 돈가스인 슈니첼은 서양에서도 일본어 그대로 '팡코'라고 불리는 입자가 굵은 파삭파삭한 빵가루를 묻혀서 두툼하게 튀긴 일본식 돈가스보다 우리나라 분식집에서 나오는 왕돈가스에 가깝다. 독일 음식으로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국적은 오스트리아로, 원래는 송아지 고기로 만든다. 물론 돼지고기나 닭고기로 만들어도 된다.



넓적한 손바닥만 한 슈니첼에 파슬리 버터를 버무린 노란 감자, 레몬 한 조각에 맥주 한 잔. 레몬즙을 뿌려서 향긋한 슈니첼을 한 입 꿀꺽 삼킨 다음 맥주로 시원하게 씻어낸다. 끈적한 점질 감자에는 감칠맛이 감돈다. 이때쯤 내 머릿속은 이걸 한 달에 몇 번쯤 먹으면 질려서 아쉽지 않게 돌아갈 수 있을지 계산하느라 바빴다.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원체 잘 질리지 않는 성격인 데다 튀긴 고기에 삶은 감자와 맥주를 거부할 수 있을 리가? 고시촌 밥집처럼 월식으로 끊어놓고 급식처럼 먹어도 물릴까 말까일 것이다.


아치형 창문 사이로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고즈넉한 성당, 매일 낯선 관광객이나 오갈 것 같은 작은 거리, 아기자기한 간판이 달린 상점들. 이방인이지만 오히려 눈에 띄지 않으면서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마을이었다. 주말이면 샌드위치를 하나 들고 마리아와 본 트랩 대령네 아이들처럼 기차를 타고 산에 오르고, 별 거 없다고 중얼거리면서 다음 날 다시 한번 올라가고.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분명 다시 찾아오게 될 것 같다고 굳게 믿으며 집에 돌아온 지도 4년이 지났다. 여권에 찍힌 도장 개수는 조용히 늘어났지만 길겐 마을처럼 한 달 살기를 시도하고 싶은 곳은 아직 본 적이 없다. 간절히 바라다보면 언젠가 가게 되겠지. 이럴 줄 알았다니까! 하면서 비행기를 잡아 타는 것이다. 자고로 내 인생의 복선은 스스로 깔아야 한다.



한 번씩 길겐 마을의 사진을 꺼내 볼 때마다 주섬주섬 슈니첼을 튀길 준비를 한다. 슈니첼이나 왕돈가스나 일본식 돈가스나 뭐 그리 다를 거 있나 싶겠지만, 똑같은 튀김 요리라도 의외로 쉽게 국적을 바꿀 수 있다. 우선 일본식 돈가스는 나가서 사 먹자. 그리고 송아지 고기 대신 돼지고기 등심을 산다. 돈가스용으로 손질한 고기를 사도 된다. 도마 위에 고기를 펴고 유산지나 랩을 얹은 다음 두드려서 얇게 편다.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다. 여기까지는 왕돈가스나 마찬가지다.


국적을 바꾸려면 튀김옷을 따로 준비해야 한다. 그릇을 세 개 준비해서 하나에는 밀가루, 다른 하나에는 달걀물을 푼다. 그리고 마지막 그릇에 빵가루를 담는다. 입자가 고운 것이 좋다. 하루 묵은 빵을 직접 갈아서 만들면 더욱 좋다. 나는 이 마지막 빵가루에 이것저것 양념을 한다. 파르메잔 치즈를 갈아서 넣고 파슬리나 타임을 잎만 다져서 섞는다. 가끔은 과립 마늘이나 양파 가루를 넣기도 하지만 치즈와 허브만 넣어도 맛이 재미있어진다.


밀가루, 달걀물, 양념한 빵가루를 순서대로 골고루 묻힌 슈니첼은 프라이팬에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앞뒤로 튀긴다. 기름에 푹 잠기도록 튀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또 매력적이다. 앞뒤로 튀긴 다음에 토마토소스를 바르고 생 모차렐라 치즈를 얹어 살짝 구우면 슈니첼 파르마schnitzel parma가 된다. 의심할 여지없이 맛있다. 원래 튀김과 치즈는 어지간하면 맛있는 반칙 기술 같은 것이니까. 완성한 슈니첼은 소금과 후추를 뿌리거나 기왕이면 본토처럼 레몬즙을 뿌려서 먹는다.


지인에게 슈니첼을 대접할 일이 생기면 이것은 평범한 돈가스가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슈니첼이라고 거듭해서 강조해야 한다. 그리고 길겐 마을의 사진을 보여주고 볼프강 호수의 반짝이는 물결을 꿈에도 볼 지경이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이야기를 한다.


내 인생의 복선을 까는 것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한 달만 살다 오겠다고 짐을 꾸려 떠날 수 있도록. 모두가 '그렇게 슈니첼 타령을 하더니 기어이 가는구나. 그럴 줄 알았어'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뒤통수에 인사를 보낼 수 있도록.



슈니첼


재료(2인분)

돈가스용 돼지고기(목살 또는 안심) 2장, 빵가루 2컵, 다진 파슬리 1작은술, 파르메산 치즈 간 것 1작은술, 달걀 1~2개, 레몬 1/2개, 밀가루·튀김용 식물성 기름 적당량씩, 소금·후추 약간씩


만드는 법

1 돈가스용 돼지고기는 랩 2장 사이에 싸거나 비닐봉지에 넣어서 고기용 망치 또는 밀대로 두드려 얇고 넓게 편다. 소금과 후추를 살짝 뿌려 간을 한다.

2 얕은 접시 또는 볼 3개에 밀가루, 푼 달걀, 빵가루를 각각 담는다. 빵가루 볼에 파슬리와 파르메산 치즈를 더해서 잘 섞는다.

3 돼지고기를 하나씩 밀가루 볼에 넣어서 골고루 묻힌 다음 여분의 가루를 털어낸다. 건져서 달걀물 볼에 담가 골고루 묻힌 다음 여분의 달걀물을 털어낸다. 건져서 빵가루 볼에 담고 골고루 묻힌다.

4 중형 무쇠 팬 또는 코팅 프라이팬을 중간 불에 달궈서 식물성 기름을 한 큰술 두른다. 튀김옷을 묻힌 돼지고기를 한 번에 하나씩 넣고 한 면당 2분씩 튀기듯이 굽는다. 다 익은 슈니첼은 건져서 종이 타월에 얹어 기름기를 제거한다. 레몬을 곁들여 낸다.

* 파르마 식 슈니첼을 만들려면 무쇠 팬에 다시 슈니첼을 넣고 토마토소스를 1큰술씩 펴 바른다. 모차렐라 치즈를 하나당 2장씩 올리고 200℃로 예열한 오븐에서 5~10분 정도 굽는다.


* <온갖 날의 미식 여행> 단행본이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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