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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주 Oct 11. 2019

블라디보스토크 마라톤 여행기

1 본격 마라톤 여행기

D-1

(한 줄 요약: 새벽 세 시에 숙소에 도착해서 네 시간 자고 마라톤 물품 받으러 간 날)


나로 말하자면 없는 걱정도 사서 한 다음 그 덕분에 별 일이 없었다고 굳게 믿는 타입이다. 이제야 겨우 돈과 여권만 있으면 해외에서도 털레털레 잘 다니게 되었는데, 첫 마라톤을 해외에서 뛰겠다고 생각하고 나니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걱정이 밀려왔다. ‘러시아 러닝’ 사이트에서 마라톤 등록을 했는데 딱히 결제에 성공했다는 메일 말고는 안내문이 오지 않아서 혹시 등록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닌가 고민한 것이 시작이었다. 


공항에서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영어는 거의 보이지 않지(내가 읽을 수 있는 키릴 문자는 P밖에 없는데 영어의 P와 똑같이 생겼지만 R로 발음한다는 것만 안다. 이게 무슨 도움이 되는가? 버거킹 로고 철자가 영어가 아닌 키릴 문자로 되어있다는 점을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다. 즉 1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전날 마라톤 물건을 나눠준다는 건물 주소도 키릴 문자라 구글 맵스에서 긁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지, 그리고 앱으로 택시를 불렀더니 언덕에서 굴러 내려온 드럼통처럼 사방이 우그러진 승용차가 왔는데 운전사도 같이 굴렀는지 경추보호대를 하고 있었고, 우리는 분명히 앱으로 팁까지 카드 결제를 했는데 시작부터 100 루블을, 그리고 도착 후에 총 350 루블을 현금으로 뜯어갔다. 영문은 몰랐지만 그냥 줬다. 범퍼라도 갈았겠지. 내리고 나니 이웃한 여러 건물에 딱히 표시가 없어서 어디가 우리가 찾는 건물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말로, 일단 여기까지 왔으면 그 이후는 요만큼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블라디보스토크 마라톤 가방을 메고 지나가는 친절한 한국인이 어느 건물로 들어가야 하는지 알려준 것이다. 사실상 요만큼밖에 안 되는 크기의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는 혁명광장에서 아르바트 거리까지 이어지는 길 말고는 그다지 다니거나 볼 것이 없는데, 그나마도 국경일을 맞아 열리는 마라톤에 참가하기 위한 여행객이 잔뜩 몰려 있어 딱히 길을 잘못 들거나 뭘 못 찾을 걱정이 없다. 


마라톤 물품을 받기 위한 신청서마저 영어로 된 것을 찾기가 살짝 까다롭기는 했지만, 어쨌든 무사히 번호표와 태극기 스티커, 헤어밴드, 팔찌, 비상용 담요(!), 귀여운 음료와 에너지바까지 배급받아 묵직해진 가방을 메고 건물을 나설 수 있었다. 아, 티셔츠도 받았다. 예뻐! 신나! 여기서 받은 번호표에는 스타트 라인을 밟을 때부터 피니시 라인을 밟을 때까지 내 타임을 자동으로 체크하는 칩이 달려 있어서 구기지 말고 그대로 티셔츠에 달아야 한다.



D-DAY

(한 줄 요약: 택시로 출발지까지 가서 총 뛴 시간보다 더 오래 기다리고 기록적인(!) 등수로 피니시 라인을 밟은 날)


많은 작가로 하여금 달리기에 로망을 가지게 만든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보면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를 묘비명으로 남기겠다는 말이 나온다. 그래서 마라톤이라는 대상을 구경이라도 하는 것 자체가 처음인 나는 진심으로 다들 처음부터 끝까지 걷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더라고?


물론 여기에는 5킬로 마라톤의 주요 코스인 루스키 섬의 다리를 포함해서 전 구간 내내 평지가 거의 없고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된다는 부분이 한몫했을 것이다. 여행 동료 중에서 하프 마라톤을 신청한 D님은 동트기 전부터 혁명광장으로 찾아가 셔틀버스를 타고 출발지점까지 이동했는데, 카톡으로 비상용 담요를 둘둘 말고 쓰러져 자는 사람이 즐비해서 왕초촌이나 다름없는 현장 사진을 보내오며 5킬로 시작 지점은 가까우니 그냥 택시를 타고 가라는 조언을 남겼다. 알고 보니 그나마 5킬로부터는 평탄한 축에 속하고 그전까지는 언덕길이 더더욱 심했다. 아니, 그렇다고 들었다. 어쨌든 그건 내 과업이 아니었으니 내 발로 직접 뛴 5킬로 구간도 오르막과 내리막이 심했다는 증언만 남길 수 있다. 


여하튼 함께 5킬로를 뛰기로 한 C님과 나는 조언대로 택시를 타고 시작 지점으로 향했다. 핸드폰과 여권(나는 해외에서 절대 여권 없이 밖을 나서지 않는다), 루블 지폐 몇 장에 돌돌 만 신용카드 하나, 비상식량 겸 카드와 핸드폰을 분리하는 칸막이 역할의 에너지바를 넣은 힙색을 메고 전날 번호표를 똑바로 다느라 안전핀으로 보이지 않는 구멍을 잔뜩 뚫고 만 마라톤 티셔츠에 레깅스를 입은 상태였다. 정작 뛰어야 하는 우리는 정확한 장소를 모른 탓에 택시 앱 지도에 나오는 비슷한 부분을 대충 찍었지만, 마라톤 티셔츠를 본 택시 기사가 알아서 시작 지점에 정확히 내려주고 떠났다. 


이, 마트 주차장에 속속 모여드는 곧 5킬로를 뛸 1200명의 사람들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출발하기까지 2시간 동안 쉴 새 없이 러시아어로 떠드는 사회자(절대 뛰지 않을 것처럼 생겼다), 줄어들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언덕 너머 화장실로 향하는 줄, 평소보다 일찍 문을 연 마트에서 산 바나나를 먹으면서 돌아다니는 러너들. 우리는 주차장 벽에 기대서서 가끔 사회자가 격앙된 톤으로 뭐라 뭐라 외치면 같이 예이~~ 추임새를 넣으며 세상의 모든 레깅스를 구경했다.


아침 7시 반의 러시아는 9월이라도 쌀쌀했기에 겉옷을 따로 챙겨 입지 않은 사람 중에는 어제 마라톤 물품을 나눠주는 곳에서 받은 비상용 담요를 두른 이가 많았다. 이 비상용 담요가 이름은 담요지만 상당히 태양열 전지용 은박지처럼 생긴 바스락거리는 재질이라 이걸 두르고 있으면 영화 <스파이>에 등장한 유로비전 2위 가수 베르카 세르두치카의 번쩍거리는 의상을 입은 백댄서 내지는 윌리 웡카 공장에서 블루베리 껌 대신 껌종이 은박지를 씹고 알루미늄 포일로 돌돌 만 공처럼 부푼 사람이 된 것처럼 보인다. 한 번 펼치면 다시 개기 힘들 것처럼 생겨서 쓰지는 않고 한국까지 가지고 돌아왔는데 진심으로 보온성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다. 러시아에서 나눠주는 거면 그래도 좀 따뜻하지 않을까? 살다가 언젠가 한 번은 도움받을 날이 오겠지. 


한참을 그렇게 구경하다가 출발할 때가 되어서 스타트 라인 앞에 팀별로 나누어 섰다. 전날 마라톤 물품을 나누어 받으면서 각자 페이스 타임에 따라 A, B, C, D로 팀을 나누게 한 다음 스티커를 배부했는데, 나는 D가 꽉 찼다는 이유로 C팀 스티커를 받았다. 30분 안에 들어오는 팀이라고? 제정신이심? 심지어 현장에 도착하니 말도 없던 E 스티커를 붙이고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저걸 나를 달라고! 


하지만 내 바로 뒤에서 왜 앞 팀은 이미 출발했는데 우리는 서 있게 하냐고 궁금해하던 일본인 할아버지는 왜 자기가 C 스티커를 붙이고 있는지도 몰랐으니 대세에 큰 지장은 없었다. 요컨대 본인 사정대로 뛰면 되는 것이지. 나는 뒷줄의 이 일본인 할머니 할아버지의 단체 사진을 찍어주면서 복잡한 현재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C님은 급 함께 셀카를 찍은 앞줄 러시아 여성분과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공유하고, 참으로 글로벌한 분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정작 달리기 시작하고 나서는 어땠는가 하면, 재미있었다. 아니, 뛸 만한데? 정말로! 그동안 나는 혼자서 뛰었기 때문에 도무지 페이스 조절이라는 것을 하기가 심히 어려웠다. 사실 그간 페이스 조절이라는 말을 관용어구처럼 사용했지만 달리기 시작하고 나서야 그게 여기서의 이 ‘페이스’라는 점을 새삼 깨달았을 정도다. 원인은 여러 가지겠지만 혼자 뛰면 사실 천천히 뛰기가 빨리 뛰는 것보다 더 어렵고, 초반에 열심히 뛰다가 빠르게 기력을 소진하고, 그래서 페이스 조절이 중요하다는 건 알겠는데 실천하는 건 정말 어려웠다. 그런데 단체로 뛰니까 조절이 되네! 신나서 열심히 뛰다가, 루스키 섬의 다리로 올라가는 즈음부터 걷기 시작했다. 정말 어디로 어떻게 보나 언덕길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진짜, 우리를 포함해서 생각보다도 걸었다 뛰기를 반복하는 사람이 많았다. 물론 그래도 걷고 있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나를 추월해서 앞서 달려간다. 그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대상으로는 머리카락이 두피에 딱 달라붙도록 양쪽으로 땋아서 공기 저항을 최소화한 날렵한 여성분, 태극기 머리핀 두 개를 완벽한 대칭이 되도록 꽂고 씩씩하게 뛰시던 아주머니, 깔끔한 번 헤어에 젓가락 같은 비녀를 꽃은 러시아 언니(언니 아닐 것 같아), 그리고 정식 등록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당당하게 번호표를 달고 침을 흘리며 웃고 있던 사모예드 한 마리와 유모차 두 대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유모차 안에 아기가 타고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참으로 바퀴가 크고 튼튼해 보이는 기종이었으니 승차감은 그리 나쁘지 않았을 것 같다. 나는 유모차를 끌 때면 내 체중을 유모차에 실어가면서 걸어가는데 저들은 오르막을 유모차를 밀면서 뛰고 있다니? 참고로 그중 태극기 머리핀 아주머니와 비녀 여성분과는 계속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달렸다. 



5km를 달리는 중에는 급수대...입니까? 이것을 공식적으로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여하튼 물과 이온 음료를 담은 순식간에 우그러지는 일회용 컵, 바나나와 사과 조각, 대추야자(!), 다카기 나오코의 <마라톤 1년 차>에서 본 물을 적신 스펀지를 나눠주는 곳이 두 군데 있었다. 고작 1km를 뛰고 연료 보충이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두 시간 동안 기다리면서 물을 전혀 마시지 않아서 목은 말랐기 때문에 이온 음료만 한 잔 받아 마셨다(이 많은 플라스틱 컵들... 재활용은 제대로 되는 것이 맞겠지). 


급수대(?) 뒤로 이어지는 길은 주로 루스키 섬 다리를 배경으로 인증샷을 남기기에 최적의 장소라 나는 물론이고 모두가 사진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헬스장을 등록하고 안 나오는 사람들이 먹여 살린다고 치면 가장 참가자가 많은(약 1,200명) 5km를 신나게 뛰고 있는 이 사람들의 참가비도 대회 운영에 한몫 톡톡이 하지 않을까? 


여하튼 그렇게 급수대도 두 곳 지나고 포토그래퍼 앞에서 괜히 열심히 뛰는 척하고 나니까 생각보다 금방 혁명 광장으로 이어지는 피니시 라인이 보였다. 사람들이 잔뜩 모여서 환호를 하고 있어! 왜 갑자기 힘이 나지? 그래서 급작스럽게 질주해서 들어갔다. 엄청나게 신나는 러시아어의 향연 덕분에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 수 없어도 흥이 제대로 났다. 나눠주는 메달을 걸고(첫 메달이야!), 오렌지와 물병을 받아 들고 광장으로 들어서자 웬 칠 척 장신의 러시아 남자 직원이 말을 걸었다. 


“다 알아요?”


…예? 어깨에 붙은 태극기를 보니 한국인 안내를 맡은 직원이 분명했는데 정말로 저렇게 물어보더니 당황한 우리에게 기록 확인하는 곳과 메달에 기록을 각인할 수 있는 곳을 알려줬다. 러시아어를 몰라서 말인데 대체 원문은 무엇이었을까? Do you know everything? 한참 줄을 서서 기다리다 마라톤을 신청했던 러시아 러닝 사이트에 들어가면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해서 로밍한 핸드폰을 한참 두드려서 내 등수를 알아냈다. 


그리고 실소했다. 딱 떨어지는 1천 등이었기 때문에! 이게 뭐야! 심지어 생각보다 잘 뛰었다. 칩 기록이 44:10야! 부실한 발목과 저질 체력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는 원래 내 체육 실력에 대한 기대치가 바닥이다. 출발하기 전에 5킬로 완주 제한 시간까지 알아봤을 정도다. 아무리 그래도 걸어서 두 시간 안에는 들어오겠지 싶었는데 뛰다가 걷다가 한 시간 안에는 들어왔어! 내 뒤로 이백 명은 더 있어! 


여기서 우리는 기대가 낮으면 실망도 하지 않는다는 고금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딱 떨어지는 숫자로 들어온 것도, 내 앞의 999명과 같은 길을 뛰었다는 것도 그냥 재미있고 신났다(중간에 나를 추월한 사모예드 강아지와 유모차 두 개를 포함하면 아마 1003등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딱히 한참 줄을 서서 메달에 각인을 남길 생각은 없어서(인스타그램에 기록을 남기는 것이 요즘 세상의 각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후에 2시간이 지나서 피니시 라인을 넘은 하프 마라톤 주자 D님을 버리고 바로 혁명 광장을 유유히 떠나 블리니를 먹으러 갔다. 



이미 열 시 반을 넘어 브런치를 즐기기 위해 아르바트 거리로 들어선 관광객 사이로 너무나 마라톤을 뛰고 온 행색을 하고 섞여 들자니 예전에 츠키지 시장에서 스시 만들기 클래스를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우리와 같이 수업을 들은 호주에서 온 여성분 둘은 도쿄 마라톤에 나가려고 온 김에 클래스를 알아봤다고 했었지. 여행만으로도 지치는데 여행 중에 운동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었던 당시의 나는 이들이 약간 선수 클래스의 나와 다른 인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4년 후 지금 마라톤 티셔츠를 입고 블리니를 먹고 있잖아? (블리니를 먹고 나서 번호표는 뗐다. 너무 실명제야…)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모르는 법이라지만 진실로 나까지 운동을 하기 시작할 줄은 몰랐다. 왠지 새로운 세상에 속한 기분이야. 그리고 생각했다. 다음에는 걷지 말고 5km를 전부 뛰어야지. 그리고 내년에는 10km를 뛸 거야. 


Blog: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http://nonameprojectstory.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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