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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JIN Oct 14. 2023

아파트 인생

아파트는 별로지만, 그래도 Cheers!



몇 년 전이었다.

제법 이름난 메밀집에서 메밀국수를 먹던 날이었다.

상업지구가 아닌 한적한 주택가 옆 대로에 위치한 메밀집이었다.

국수 한 그릇을 배부르게 먹고 창 밖을 내다보던 나는 기이한 광경을 보았다.

내려다 보이는 그곳은 분명히 가정집 정원이었는데 골프웨어를 입고 챙이 좁은 모자를 쓴 채 골프채를 잡고 서 있는 두 남자를 본 것이었다.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다가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그러다 채를 들어 자세를 잡기도 했다.

그랬다. 집 안에서는 두 남자가 골프를 치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그 눈 부시게 푸르던 초록 잔디, 그 위에 내리쬐던 새하얀 햇살, 남자들의 복장과 서 있는 자세. 골프공이 데구루루 굴러가던 모습.

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날아와 사진처럼 한눈에 박혔다.


아... 집 안에서 골프를 칠 수도 있구나.

그냥 퍼팅 연습 정도가 아니라... 둘이서 경기를 할 수도 있구나.

대체 저 집 정원은 얼마나 큰 거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은 얼마나 넓은 걸까?

저렇게 온전히 누릴 수 있는 마당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힘들게 바리바리 싸들고 산으로 바다로 들로 캠핑을 다니지 않아도 되겠다.

마당에 의자 하나만 펴고 누우면 그곳이 숲이고 들이고 산일 텐데...


그 당시 나는, 자연 속에 고요히 누워있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 오래고 열렬한 캠퍼였다.

매주 떠나기도, 2주마다 떠나기도 하던 그 기간이 그때 이미 십여 년이 넘었으니 내가 자연 안에 들어가 있는 것에 얼마나 진심이었던가.

지금도 여전히 캠퍼이긴 하지만 짐을 꾸리고 풀고, 다시 싸고 펼치고 하는 노동은 여간 힘든 게 아니고, 해가 갈수록 점점 체력이 떨어져 먼 거리의 이동도 힘에 부치는터라 서울 밖으로 떠나는 횟수가 급격히 줄고 있는 중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내내 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사람이 가진 부(富)가 부러운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정원과 그 사람의 하늘과 그 사람의 나무와 그 사람의 공기. 그것이 부러웠다.

서울을 떠나고 싶진 않았고, 마당이 있는 집에는 살고 싶고.

그동안 차마 꿈에도 꿔보지 못했던 아니, 얼핏 꿈에서만 그려보던 그 마음이 갑자기 간절해지기 시작했다.

나에게 얼마 정도가 있으면 저 집만큼은 아니더라도 아담한 내 마당이 있는 집을 가질 수 있을까?

그 마당에 나무도 심고, 꽃도 기르고, 벤치도 놓고, 해먹도 달고, 기척 없이 놀러 오는 새와 고양이와 이야기도 나눌 수 있을까?


검색에 들어갔다.

검색을 해보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었던 건, 사실 그 정원 있는 집이 내가 사는 곳에서 그리 먼 곳이 아니었고 행정구역상으로는 서울시가 아니었기에 어쩌면... 조금 무리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무지한 생각 때문이었다.

검색 결과는 참담. 참혹. 경악스러웠다.

온라인에 나와 있는 것을 토대로 한 대략의 검색이긴 했지만 일단 그 동네는 오래된 주택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택 매물 자체가 없었고, 매물로 나와 있는 단 하나의 물건은 그 가격이 무려... 70억이 넘었다.

7억이 아니라 70억. 매매가 70억+a


와........

차마 범접할 수 없는, 차마 꿈꿔볼 수 없는.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던데, 서울 안에 그 많은 건물 중에 코딱지만 한 그 어느 것도 가지지 못한 내가 꿈꾸기에는 너무 먼- 아득한 딴 세상의 금액이었다.

상업시설도 아닌, 빌딩도 아닌, 서울과 인접하긴 했지만 서울도 아닌, 그 오래된 동네의 마당 있는 집 가격이 70억 이상이라니.

심지어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거의 7~8년 전이었으니 그사이 부동산 폭등을 겪은 현재의 가격은 아마 못해도 1.5~2배는 되어있지 않을까?



< wikimedia.org >



서울에서 혼자의 몸일 때를 제외하고는 나는 내내 아파트에서만 살았다.

지금까지 총 3군데의 아파트를 거쳐 현재가 4번째 아파트인데, 특별히 아파트가 좋았다기보다 별다른 고민 없이 아파트로 시작했고, 자연스레 다음 아파트로 또 다음 아파트로 옮겨 다니게 되었다.

첫 번째 아파트였던 신혼집은 그 당시 지하철 노선의 종점이었던 서울의 끄트머리에 있었다.

처음 가보는 그곳은 살 동네를 정하고 집을 구한 것이 아니라 가진 돈에 맞춰 갈 수 있는 동네를 부동산에 물어 찾은 낯선 곳이었다.

신축 아파트는 아니었지만 단지 전체가 층이 낮고 오랜 세월 가꾼 녹지가 푸르고 아늑했던 복도식 아파트였다. 지하철역에서 걸어 채 1분이 걸리지 않는 초역세권이었고, 갓 오픈한 대형 마트 또한 단지 바로 앞에 있어 걸어 1분이 걸리지 않았다. 사립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품고 있었으며 구립 도서관과 구립 체육센터, 문화센터가 걸어 5분 거리에 있었던 지금 생각해 보면 최고의 입지에 있었던 곳이었다.

그 어느 동의 3층, 17평 조그마한 집이 내가 꾸린 우리 가족의 첫 아파트였다.

서울살이 이전에 살던 지역에서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던 아파트 평수, 17평.

그곳은 우리가 가진 돈으로 구할 수 있는 최대의 크기였고, 그 돈으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환경이었다.


그곳에서 3년을 살고, 뱃속에 아이를 품은 채 조금 더 아이 키우기 좋은 환경의 조금 더 넓은 집으로 동네를 옮겼다. 아예 구(區)를 옮겨 이사를 갔는데 그 구는 아마 거의 모든 주택이 아파트가 아닐까 싶은 거대한 아파트촌이었다. 내가 살게 될 동(洞) 뿐 아니라 이웃하는 모든 동이 당시로 30년 전 대대적으로 지어진 철저히 계획된 아파트 도시였다. 대로를 중심으로 양쪽이 죄다 고층 아파트였는데 그즈음이 되니 아파트 외벽의 도색은 빛이 바래 있었고 그 빛바랜 벽 위로 재개발을 희망하는 플래카드들이 단지마다 붙어 있었다. 주차장은 지하가 없어 언제나 이중, 삼중 주차에 자리가 모자랐으며 실내 방음은 잘 안되어 의도치 않게 이웃의 사생활을 알게 되기도 했지만 오래 가꾼 녹지와 조경이 그 모든 단점을 상쇄할 만큼 멋들어진 곳이었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젊은 부부들이 많이 살았고 가까운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상업 인프라와 교육환경이 잘 형성되어 있었다. 그 환경을 매개로 커뮤니티도 자연스레 만들어져 새로운 친구들도 생겨났다. 아이도 친구를 갖게 되고 나도 친구를 갖게 된 것이다.

아파트가 주는 안정성과 보안, 편리함에 길들여져 아파트가 아닌 삶을 생각해 볼 수도, 해 볼 필요도 없이 살게 되었다.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아파트에서 아파트로의 이동은 조금씩 눈에 보이는 변화가 생겼다. 

집의 크기도, 집의 상태도, 집이 있는 동네도 조금 더 나은 환경으로의 이동이 되었으니 이것도 발전이라면 발전일까...

그렇게 또 한 번의 지역 이동으로 지금의 동네에 정착을 하고 산지 십 년이 훨씬 넘었다.

이번에는 대규모 신축 아파트 단지로의 입주였다. 도로도 집도 이웃도 환경도 모두 새것이었다.


누구나 한 곳에 오래 살면 그곳에 익숙해지고 편해지고 정이 들기 마련이다. 그래서 전에 살던 곳을 떠나 지금의 아파트로 옮겨 올 때 꽤나 고민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서울에서, 아파트에서의 삶은 철새의 이동과 같았다. 그저 이동할 때가 되면 적절한 곳을 찾아 옮겨 다니고 그곳에서 짐을 풀고 한 철을 나는 철새. 그곳은 고향의 집처럼 터를 잡고 오랜 시간 마음을 쏟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아파트란 그저 도시인에게 필요한 소모품 같은 것.

오래 살아 정이 든다는 것 또한 집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주변의 환경과 주변의 사람과 익숙해졌던 그 모든 것이 편했던 것일 뿐. 콘크리트로 만든 개성 없는 집이 그다지 정다울 것은 없었다.


새 아파트에서 아이는 아토피를 얻었고, 나는 지독한 장염과 두통에 시달렸다. 

그것이 반드시 집 때문이라는 근거는 없지만 우리의 몸과 생각은 그 결론에 도달했고 많은 고민을 했다. 

그렇다고 집을 버리고 나올 수 있는 다른 방도 또한 없었으니 나는 육식을 완전히 끊었고 아이에게는 인스턴트와 레토르트와 과자와 통조림과 가공육과 냉동식품을 먹이지 않았으며 외식과 배달음식은 전무했다.

모든 수건과 행주와 속옷은 매번 삶아 사용했고 아이의 몸에 닿는 옷은 면으로만 입혔다. 그리고 우리는 주말마다 짐을 꾸려 자연 속으로 캠핑을 떠나는 것으로 시멘트와 콘크리트 공화국을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숲의 울창한 나무속에서, 산의 청명한 바람 안에서, 바다의 뻥 뚫린 수평선 앞에서 도시의 분주함과 아파트의 갑갑함을 상쇄할 수 있었다.

이것은 여전히 진행 중인 일종의 신념이자 생활 방식이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 기준선은 조금 유해졌고 체력도 점점 떨어져 힘에 부칠 때가 있다.

체력을 핑계로 가장 먼저 게으르게 된 것이 바로 캠핑이다. 나는 이미 20년 차 캠퍼지만 집을 떠나는 일은 여전히 분주하고 힘이 든다. 다녀오고 나면 이삼일쯤 몸살을 앓는 일도 잦고 일하는 데도 지장이 생겨 이제는 밖으로 떠나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고 도시의 공원을 자주 찾는 것으로 그 기분을 대신하게 되었다.



< pxhere.com >



그래서 그런 것이다.

내 마당이 갖고 싶다는 것. 내 하늘이 갖고 싶다는 것, 내 나무가 갖고 싶다는 것.

서울을 버리지 않고도 그러한 내 자연과 내 공간을 가지고 싶다는 것.

그렇다면 아파트가 아닌 주택이어야 하는데... 서울 안에서 그것이 가능할까?

메밀집 너머 눈부시게 푸른 잔디가 깔린 그 집을 보았을 때부터 나의 열망은 시작되었고 간단한 검색으로 어마어마한 집 값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열망은 헛된 것임을 깨달았으며 그래도 놓지 못하는 미련으로 서울이 아닌 경기도의 주택 단지들을 보러 돌아다니고 남의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구경하고 그러다 다시 서울을 포기하지는 못한다는 결론에 이르고 그렇다면 서울 안에서 주택에 산다는 건 가능할까?라는 의문으로 도돌이표처럼 다시 돌아오고...


어쩌면 내 생(生)은 아파트 인생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세인들의 말대로 나이가 들수록 관리가 쉬운 적당한 크기의 아파트에 살아야 한다는 말도 맞고, 나이가 들수록 큰 병원과 교통과 환경이 잘 갖추어진 대도시에 살아야 한다는 말도 맞는 것 같다.

집을 지어 살아본 이들은 하나 같이 말한다. 주택은 젊을 때, 힘이 있을 때 살아야 한다고. 할 일이 끊임이 없다고. 젊을 때 주택에 살고 나이가 들면 대도시의 아파트에서 살아야 한다고.


결론은 이미 난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 서울을 버리지 못하고 서울 안의 주택에 살 수도 없으니 나이가 들어 탈 서울과 주택의 삶을 택하든지, 아니면 영원히 아파트와 서울을 고집하든지.


혼자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어쩐지 마음이 씁쓸해지는 밤이다.

그저 서울이 가진 도시공원이나 부지런히 즐겨야겠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감사할 일이며, 그러니 없는 것에 목매기보다 있는 것을 누리며 사는 수밖에.

더불어 나 같은 씁쓸함을 가진 모든 아파트 인생들에게 오늘 밤 맥주 한 잔을 권할 수밖에.

우리는 어차피 동지라고. 그러니 외롭지 않다고. 가지고 싶은 것 대신 이미 가진 것들을 마음껏 즐기자고.  


동지들! 치얼스!



< pxhere.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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