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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우지니 Apr 18. 2023

모든 시도의 무게

<2억 빚을 진 내게 우주님이 가르쳐준 운이 풀리는 말버릇>이라는 책에서는 매일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루에 500번씩 하며 우주에서 준 힌트를 빨리 '실행'하라고 말한다. 그 책을 인상 깊게 본 후, 나는 내 주위에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우주에서 준 힌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평소에 내가 해보지 않은 것들을 제안받았을 때, 저항하지 않고 '그냥 해야겠다'라고 다짐했다.

그런 의미로, 레진을 호기롭게 사러 갔던 것이었다.


비싼 레진을 막상 사 오니, 뚜껑을 열기가 겁이 났다. 레진과 하드너를 어떤 비율로 섞는지 듣긴 했지만, 과연 그게 잘 될지, 용기는 어떤 것을 쓸지, 레진을 저을 때 뭘 써야 하는지, 토치에 가스는 어떻게 주입하는지, 주입하다가 펑 터지는 건 아닌지, 유포지는 어디서 사는지, 종이는 판넬에 어떻게 붙이는지, 그 판넬은 어디서 사는지 모든 것이 미궁 속이었다. 어떤 재료를 쓰는 건지 수백 개의 영상을 보며 단서 같은 정보를 하나씩 찾았다.


이번에는 한국에서 그 재료들을 어떻게 구입할지 찾을 차례였다. 외국에서 흔히 쓰이는 재료들은, 한국에 없는 것이 많았다. 레진 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아 외국처럼 그 재료를 쓰는 사람이 없으니 판매하는 곳도 찾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이름을 뭘로 검색해야 할지도 몰라 온갖 이름으로 검색을 하다가 아마존 사이트로, 중국 사이트로 내가 필요한 것을 찾아다녔다. 몇 달에 걸쳐 뿔뿔이 흩어진 구매 목록을 모았다. 구입처만 한 곳에 모아놓아도 살 것 같은데.. 싶어, 언젠가 레진 재료를 모조리 모아놓는 사이트를 하나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레진을 구입하고 시작도 못하고 있으면서도 무슨 배짱이었을까. 언젠가 퀄리티 높은 작업을 하는 작가가 되리라. 사온 지 한 달 만에 레진을 조심스레 열었다. 시작하는 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궁금해하던 것을 하나씩 체험하며 알아갔다. 기왕이면 가장 좋은 재료로 가장 멋있는 것을 만들고 싶었다.

여러 두께의 종이, 판넬, 타일, 잉크 등등의 재료를, 돈이 생기는 대로 사모았다. 남편 월급이 들어오는 날을 기다렸다가 형편 되는 데까지 몇 가지를 사고, 또 그다음 달을 기다렸다가 못다 산 재료를 샀다. 입에 들어가는 것, 입는 것, 사람 만나며 인심 쓰던 것은 모두 중단했다. 안 입고 안 먹어도 행복했다.


아이들을 재우고 얼핏 잠이 들었다가도 새벽 1시쯤 일어나 아침까지 작업하는 것은 수채화를 그리던 때에 이어 계속되었다. 이렇게 재미있는 놀이터라니! 여건만 된다면 24시간 만들기만 하고 싶었다. 모든 재료가 신기했고 모든 과정이 데이터로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어느 날, 친한 친구가 우리 집까지 먼 걸음을 해주었다. 이사한 집의 방 한 칸이 나의 작업실이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작품들을 친구에게 직접 보여줄 수 있어 두근두근 설레었다. 작업물들은 쌓이고 쌓여 벽에 몇 겹으로 기대어져 있었고 선반마다, 벽마다 빼곡하게 들어차있었다.


방에 들어서며 친구가 말했다.

"이렇게 실패작이 많다니!"






그랬다. 그러고 보니 겹겹이 쌓인 작품들 중 실패작이 가득했다.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예쁜 작품은 수십 개의 실패작 사이에 어쩌다 나오는 결과물이었다. 인스타만 보고는 알 수 없는 세계를 보자, 친구는 갑자기 모든 걸 깨달아버린 탄성처럼 나지막한 문장을 내뱉은 것이었다.

너의 재능에 놀라고 늘 감탄만 했다고, 어쩌면 저렇게 만드는 것마다 예쁠 수 있는지 감탄의 대상이기만 했다고 했다. 그렇지만 실은, 이렇게 노력이 있었구나, 이제 결과물에 납득이 되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나는 세상에 내놓을 수 없는 것들을 '실패작'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지 않고 있었더랬다. 나에게는 모든 결과물이 성공작이었다. 뭐든 만들다 보면 '이렇게 하면 성공하는구나'와 '이렇게 하면 실패하는구나'가 똑같은 무게의 데이터가 된다. 성공하는 법만큼이나 실패를 피해 가는 법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느냐 없느냐만 있다. 성공과 실패는 없는 것이었다.


친구의 말에 나는 이렇게 많은 시도를 해온 내가 기특해지며 코끝이 찡했다.

데이터는 그 후로도 계속 쌓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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