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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 Oct 22. 2017

천천히 수영하기

'속도'에 관하여

10월이 되면 네이버 인기검색어에 '00 채용'이 자주 올라온다. 취준생 시절 입사지원서를 쓸 때 의외로 가장 고민되는 칸은 취미였다. 독서라고 쓰면 너무 히키코모리 같고, 그렇다고 부장님들이 좋아한다는 취미인 등산이라고 쓰기엔 양심에 손을 얹고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만만한 '수영'을 자주 썼다. 적당히 활동적이면서도 무난한 것 같은 이미지를 주는 취미. 잘하지는 않아도 좋아하는 게 취미니까 괜찮겠지 하고 칸을 채웠다.


한강 횡단 수영대회(?)를 나갈 정도로 수영을 좋아하는 엄마 덕분에 자연스럽게 수영을 오래 해왔지만, 아쉽게도 엄마의 운동신경을 하나도 물려받지 못한 나는 잘하지 못한다. 그래서 '초급', '중급', '고급'으로 나뉜 수영장 레인 앞에서 나의 실력을 고민하곤 한다. 그렇게 레인을 선택해도 너무 바짝 쫓아오거나 일부러 보란 듯이 추월해서 가는 사람은 꼭 있다.


이렇게 항상 '상중하'로 나뉘는 것에 익숙했던 나는 대만 교환학생을 갔을 때 작은 충격을 받았다. 대만의 수영장은 '초급', '중급', '고급'으로 레인을 나누지 않는다. 대신 '천천히(慢速)', '빠르게(快速)' 로만 구분되어 있다. 평형을 하며 유유자적 하고 싶은 날도 있고, 속도를 내며 자유형으로 격하게 운동하고 싶은 날도 있는 것이다. 선수가 아닌 이상 실력은 중요하지 않다. 그 날의 나의 기분, 나의 컨디션이 중요한 것이지.


결국 모 기업 최종 면접 때 수영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남성적인 문화로 유명한 기업에다가 최종면접자 중에 나 혼자 여자여서 기억에 남는다. "취미가 수영이라고 적었는데, 100m 어느 정도 하나?" 임원은 끈질기게 몇 초에 완주하는지 물어봤고, 한 번도 시간을 재면서 수영해본 적이 없는 나는 우물쭈물거렸다. 깔끔하고 당당한 면접자들 사이에서 한없이 쭈구리가 되었다. 결과는? '귀하의 뛰어난 역량에도 불구하고 한정된 인원으로 인하여..'로 시작되는 낙방 메일!


만약에 "넵! 저는 자유형으로 100m 1분 30초정도 합니다. 아직 부족한 실력이지만 제 목표는 1분 안으로 기록을 단축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저는 목표를 정하고 이를 달성하면서 성취감을 느낍니다!" 라고 말했으면 붙여줬을까? 아니겠지.


요즘도 가끔 주말에 수영장에 간다. 느릿느릿 천천히 수영하고 싶은 날에는 어느 레인에 서야할지 고민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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