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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웃클라쓰 Aug 25. 2020

'롤리타'와 탐미주의에 대한 고찰

롤리타, 돈키호테 그리고 진실

1. ‘롤리타(Lolita)’

롤리타 콤플렉스. 우리에게는 ‘로리타’로 잘 알려져 있는 단어입니다(로리타는 일본식 발음이고, 실제 영어 발음은 ‘롤리타’에 더 가깝습니다.). 롤리타든 로리타든 소아성애를 뜻하는 이 단어,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텐데요. 롤리타 콤플렉스는 소아성애자의 그릇된 욕망과 환상을 은 소설 『롤리타』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롤리타의 주인공 험버트 험버트는 문학 역사상 가장 우스꽝스럽고 비열한 악마라고 소개되곤 하는데요. 소설에는 파렴치한 악마의 시선이 더할 나위 없이 지적이고 유머스러우며 관능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오로지 롤리타라는 어린 여자 아이를 향해서 말이죠. 유명한 소설의 첫 문장을 보시죠.     


영화 롤리타(1997)와 소설 롤리타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 끝. 롤. 리. 타.

Lolita, light of my life, fire of my loins. My sin, my soul. Lo-lee-ta: the tip of the tongue taking a trip of three steps down the palate to tap, at three, on the teeth. Lo. Lee. Ta.      


짧은 문장입니다. 그러나 놀랍도록 풍부합니다. 롤리타라는 세음절의 단어가 제각기 다름 리듬으로 세 번 호명됩니다. 이런 리듬 안에서 그녀는 시각과 청각, 언어감각을 두루 자극하는 무언가로 묘사되어있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이런 탐미적인 문체로 소아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써 내려갔습니다.     


1950년대에 나보코프가 롤리타를 출간하려 할 당시 미국 출판사들은 하나같이 이를 거절했습니다. 소아성애자의 이야기라니 윤리적인 이유에서도 출간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롤리타는 출간될 수 있었고, 현재는 영미 소설의 최고를 꼽을 때 항상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소설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러시아계 미국인 소설가


나보코프는 롤리타를 오해하는 독자와 출판사를 비난하며 롤리타는 험버트를 두둔하기 위해서도, 반대로 사회에 윤리적 교훈을 던지기 위해서도 쓴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롤리타는 무엇을 위해 쓴 소설일까요? 오늘은 소설과 영화로도 제작된 ‘롤리타’를 통해, ‘탐미주의(또는 유미주의)’에 생각해보려 합니다.   

  

※ 영화의 줄거리와 함께 영상을 통해 내용을 확인하실 분들은 아래 영상을 시청해주세요!     

https://youtu.be/RJnImdFjL88


2. 1인칭으로 표현된 험버트의 시선

우리는 이 소설과 영화가 1인칭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영화를 보시면, 영화는 내내 험버트의 시선과 나레이션으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화 안에서 관능적이거나 도발적으로 묘사된 롤리타에 대한 시선은 온전히 험버트의 것이라는 거죠. 험버트는 영화 내내 어떤 착각에 휩싸여 있습니다. 이것을 바라보는 독자나 관객은 같은 오해를 하게 되어있죠. 롤리타의 시선이 배제된 1인칭이었기 때문에 관객들도 그것을 눈치채기가 어려운 것이죠. 험버트가 오해한 건 롤리타뿐만이 아닙니다. 극작가 퀼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영화 중반 이후로 험버트는 롤리타와의 사이를 퀼티가 방해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롤리타와 마찬가지로 험버트는 퀼티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퀼티는 롤리타와 험버트의 관계를 방해하지 않았고, 오히려 롤리타가 퀼티를 좋아했던 겁니다. 마침내 모든 것을 알게 된 험버트는 퀼티를 총으로 쏘아 죽여버리고 말죠. 잘못 알고 있던 진실을 지워버리기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요.      


주인공 '험버트 험버트'


결말에 이르러 관객들은 험버트가 망상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지만 롤리타가 진실을 말해주기 전까지 우리는 험버트가 보는 방식대로만 롤리타를 바라보게 됩니다. 험버트가 진실을 깨닫는 동시에 관객 또한 험버트와 함께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죠. 기분이 더러운 한편 왜 굳이 이런 1인칭 시점으로 소아성애자의 이야기를 다뤘는지 의문이 듭니다.      


윤리적 교훈을 위해 롤리타를 썼다면 3인칭 관찰자 시점이나 전지적 작가 시점이 더 적합했을 겁니다. 그래야 험버트라는 괴물의 내면을 객관적으로 알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나보코프는 『롤리타』를 1인칭이라는 영원한 감옥에 가두면서 독자가 사건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험버트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정확히’ 내리기 어렵게 만들어놓은 것이죠. 험버트가 나쁜 놈이라는 것은 누구나 대충은 알겠지만, 객관적으로 어떻게 나쁘고, 왜 이 모양이 되었는지 알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또 롤리타의 생각 또한 우리는 알 방법이 없습니다. 이런 작품 전체의 형식을 생각해봤을 때, 롤리타가 윤리적 교훈을 위해 쓴 작품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롤리타라는 작품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3. 탐미주의

롤리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는 나보코프라는 탐미주의자의 생각을 한번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탐미주의는 보통 예술의 아름다움은 도덕성이나 실용성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입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시를 들어보죠. 여러분은 혹시 노을이 지기 직전의 보랏빛 하늘을 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보기 드문 빛깔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지 않나요? 그런데 도시에서 보이는 보랏빛 하늘이 대기 중에 있는 매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나요? 그러나 우리는 설사 보랏빛 하늘의 이면에 대기오염이라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보랏빛 하늘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흔히 말하는 나쁜 남자나 나쁜 여자에 끌리는 것도 비슷한 현상입니다. 나쁘지만 매혹적이어서 이것에 끌리고 마는 것. 이런 것도 탐미주의의 속성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도시의 보랏빛 하늘


탐미주의자 나보코프는 롤리타를 통해 이렇게 묻는 듯합니다. 왜 우리는 험버트 험버트라는 추악학 악마가 보여주는 아름다운 문체에 넋을 잃고 마는가? 왜 그는 첫 문장부터 우리를 사로잡는가? 왜 소아성애라는 더러운 소재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다룬 예술적 형식에 서서히 빠져들고 마는가? 탐미주의자라면 그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갈 것이고, 도덕주의자라면 그 아름다움을 바라보길 포기할 것입니다. 나보코프는 마치 탐미주의자의 입장처럼, 진정한 예술가라면 진실보다는 아름다움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아름다움이 없는 것은 예술이 아니니까요.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실 건가요?      


탐미주의자의 생각이 석연치 않게 느껴지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기 전에 사실 우리 자신도 탐미주의의 마수로부터 그렇게 자유롭지 않을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나 자신이 예술이나 아름다움과는 무관한 사람처럼 보일 지라도요.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죠. 우리는 종종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면서 지금보다 더 잘생겨지거나 예쁘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혹은 좀 더 멋져 보이기 위해 세련된 옷을 입고 좋은 향수를 뿌리죠. 여유가 더 있다면 외제차를 타고 명품백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외면의 ‘아름다움’은 사실 내면의 ‘진실’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나쁜 사람도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며, 착한 사람도 추한 용모를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내면의 진실보다는 외면의 아름다움에 더 쫓기곤 합니다. 이것이 탐미주의자의 생각과 그리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탐미주의는 이런 인간의 속성을 극대화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탐미주의자의 속성과 나 자신의 속성이 그리 다르지 않다면 우리는 롤리타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하는 것일까요? ‘험버트 험버트’는 그저 환상과 아름다움에 취약한 인간의 본능을 가감 없이 밀고 간 인물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요?     


4. 진실

롤리타와 비슷한 인물을 지녔지만 결말이 다른 소설을 소개해드리면서 이야기를 마무리드리고 싶습니다. 바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인데요. 돈키호테는 기사도 소설을 너무 많이 본 나머지 자신이 소설 속 기사라고 착각하게 된 사내입니다. 진정한 기사라는 꿈과 환상에 빠져 일생을 허우적대다 임종에 이르러서야 그 환상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험버트 험버트를 일컬어 이 돈키호테의 후예라고 말하곤 하죠. 험버트도 돈키호테 못지않은 낭만주의자고, 이상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도 돈키호테처럼 현실의 사정, 이를테면 진실이나 윤리적 정당성 따위는 개의치 않는 존재입니다.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2018)'의 한 장면


소설에는 험버트가 롤리타 나이 때의 여자애들을 일컬어 님펫이라고 묘사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님펫(Nymphet)은 그리스 신화의 요정을 뜻하는 님프Nymph에 지소指小접미사 –et를 붙인 단어로 ‘성적 매력을 가진 여자 아이’를 뜻합니다. 소설에서 님펫은 ‘야릇한 기품, 종잡을 수 없고 변화무쌍하며 영혼을 파괴할 만큼 사악한 매력’을 지니며 ‘예술가인 동시에 광인’인 자만이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지소사 : 원래의 뜻보다 더 작은 개념이나 친애()의 뜻을 나타내는 접사 / 네이버 국어사전)


그리스 신화의 '님프(Nymph)',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 모습의 요정을 말한다.


험버트는 평범한 여자애에 불과한 롤리타에게 님펫이라는 낭만적인 환상을 덧씌웠습니다. 롤리타를 그리스의 요정으로 만듦으로써 자신을 그 신화의 주인공으로 격상시키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험버트는 돈키호테의 낭만 정신을 물려받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비슷한 부류의 인물들이 각자 다른 결말에 이른다는 것을 유심히 봐야 합니다. 자신만의 환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험버트와 달리 돈키호테는 죽기 직전에 뒤늦은 통찰을 얻습니다.      



“나는 아마디스 데 가울라 그리고 그와 같은 부류의 무수한 사람들을 혐오한다.......”     

(* 아마디스 데 가울라 : 중세 기사도 로맨스의 주인공)


돈키호테는 아마디스 데 가울라 그리고 그와 같은 부류의 무수한 사람들. 즉 그가 경외하기 마지않았던 기사도 정신이 자기만의 환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침내 거기서 벗어나게 됩니다.     

 

죽음 앞에서는 진실이 남는 법입니다. 죽고 나면 모든 허상은 사라지기 마련이니 돈키호테는 그제야 자기 자신을 직시했던 것 같습니다. 진실을 마주하고 그것을 직시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돈키호테의 고백은 환상에 빠진 자아를 극복한 진정한 승리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돈키호테가 경외한 기사도 정신이 허상이었다는 것은 그가 죽고 나서도 끝내 남을 유일한 ‘진실’입니다. 우리가 아직까지 돈키호테를 읽는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은 어떤 ‘진실’을 발견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영화 롤리타를 통해 탐미주의에 대해 이야기해보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 탐미주의자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나도 모르게 영화 속 험버트처럼, 또는 돈키호테처럼 진실을 외면하고 어떤 환상에 사로잡힌 채 도덕적 결함 앞에서도 자신을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영화의 결말과 돈키호테의 결말을 통해서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자기를 사로잡는 환상을 버리고 진실을 되찾는 데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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