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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웃클라쓰 Nov 09. 2020

현실일까 꿈일까, 사실일까 아닐까

영화 '인셉션'과 장자, '호접지몽'

놀란 감독의 영화에는 항상 비슷한 테마가 반복된다는 걸 아시나요? 기억과 실존에 대해 이야기는 메멘토(Memento 2000), 시간의 폭에 대해 다룬 인셉션(Inception, 2010), 과거와 미래의 만남이 나오는 인터스텔라(Interstellar, 2014) 등이 대표적이죠. 놀란 영화는 대체로 복잡한 플롯(Plot, 소설에서 사건의 논리적인 패턴과 배치를 일컫는 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이 복잡한 플롯도 사실은 놀란 감독 특유의 시간 놀음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놀란은 왜 이토록 시간에 집착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아직은 정복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어서가 아닐까 합니다. 이 ‘시간’에 관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생각을 영화 인셉션을 통해 들어보려고 합니다.     



2.

인셉션의 플롯의 큰 특징은 시간이 케이크처럼 층층이 쌓여있다는 것인데요. 일반적인 영화의 진행과 달리 인셉션은 약 네 개의 동시간대를 다루고 있습니다. 현실에서의 2분이 꿈속에서는 20분으로 다시 꿈에서의 20분은 꿈 안의 꿈에서 2시간이 되는 식으로 말이죠. 이 꿈에서 꿈으로의 하강이 시간의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영화에 따르면, 현실에서의 5분이 꿈에서는 약 1시간이라고 합니다.    


인셉션은 네가지 시간대의 이야기가 동시에 펼쳐진다


영화를 시간의 횡이 아닌 종으로 진행시켜나갈수록 시간은 자연스럽게 지연이 되게 됩니다. 꿈속으로 내려갈수록 그 이전 단계보다 많은 시간을 점유할 수 있기 때문이죠.(영화의 설명에 따르면 깊은 단계의 꿈에 들어갈수록 뇌의 활동이 활성화되어 시간이 지연된다고 합니다.) 림보라는 단계에까지 이르면 인간이 시간을 거의 완벽하게 점유하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바꿔 말하면, 시간이 거의 흐르지 않는 것이죠. 주인공 둠 코브도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림보에서 영원을 약속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일 것입니다. 림보는 인간이 시간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니까요. 현실의 한순간만으로도 림보에서는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영화 인셉션 속 림보의 모습


그러나 림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놀란은 영생이 가능한 이 공간을 마냥 긍정적으로 바라본 것 같지는 않습니다. ‘림보(Limbo, 고성소古聖所)’는 가톨릭의 사후세계 중 하나인데 예수를 미처 알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잠시 머무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상에 이로운 일을 했으나 성서의 교리를 접하지 못했던 자들이나 가톨릭이어도 여타 사소한 죄들이 남아 있는 자들이 림보에 있다고 하죠. 이처럼 림보는 천국도 지옥도 아닌 그 중간의 상태를 일컫습니다. 이와 같은 묘사는 유명한 소설 단테의 신곡에도 등장하는데요. 어쨌든 림보는 천국도 지옥도 아닌 어정쩡한 곳이기에 결국 목적지가 아니라 거쳐 가는 곳에 불과한 것입니다. 좋든 나쁘든 영원히 거주할 곳은 못 되는 겁니다.     


천주교의 '림보'


주인공들 또한 이 영원한 공간인 림보에 대한 반응이 엇갈립니다. 코브의 아내 ‘맬’은 림보에서 빠져나가길 원하지 않습니다. 원치 않는 것을 넘어 꿈인 림보와 진짜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죠. 이런 괴리로부터 말을 구해내기 위해 코브는 발버둥 치지만 결과적으로 그녀를 구해낼 수 없었습니다.      


반면 영화 말미에 이르러 주인공 코브와 사이토는 림보 안에서 몇십 년을 보내게 됩니다. 원한 바는 아니었지만 세월이 흐르게 된 것이죠. 그러나 이들은 결국 림보 안에 갇혀 사는 것을 거부하고 탈출하게 됩니다. 림보는 그저 꿈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듯이 말이죠. 


거의 영원한 시간을 누릴 수 있는 ‘림보’에 빠지게 된다면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실 건가요? 영원한 시간이지만 환상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탈출하실 건가요? 아니면 꿈이지만 내 의식과 의지가 분명히 존재하므로 그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여기실 건가요? 답변하기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사실 림보가 마냥 꿈이라고만 이야기할 수 없는 게, 코브와 말이 그랬던 것처럼 이 꿈 안에서는 서로의 의식이 공유되기 때문입니다. 림보 안의 존재들은 서로 말을 하고 소통을 합니다. 사랑을 약속하는 것도 가능하죠. 내 의지와 의식이 존재하고, 심지어 함께 의식을 공유할 수 있다면 그게 과연 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3.

이와 같은 인셉션의 ‘꿈’에 대한 묘사를 보면, '장자의 호접지몽'에 대한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어느 날 장주(莊周)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 보니 다시 장주가 되었다.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주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알 수가 없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일러 ‘사물의 변화(物化)’라 한다.”

- 『장자莊子』, 내편內篇 제물론齊物論, 호접지몽胡蝶之夢     


호접지몽은 『장자』 내편 제물론에 나오는 내용으로 장주(莊周, 장자의 이름)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고 깨어났는데 내가 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내가 되는 꿈을 꾼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꿈 그러니까 ‘나비로 된 꿈’과 ‘나비가 꾸는 꿈’은 불분명하게 얽혀 있어서 꿈을 꾸는 주체가 장주인지 나비인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장주와 나비의 구분이 모호해지기 때문에 꿈과 현실, 환상과 실재의 구분 또한 모호합니다. 


'장자'의 '호접지몽'


이 호접지몽의 두 가지 꿈에 빗대어 볼 때, 림보와 림보 밖 현실의 관계 또한 장주-나비의 관계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림보가 그저 환상에 불과하다고만 생각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림보 안에서 서로 간의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림보 안에 주입한 조그만 현실이 림보 밖의 현실에까지 거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생각해보시죠. 이것을 호접지몽이 말하는 또 다른 실재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합니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구별이 없다면, 현실과 우리의 꿈 사이에 사실 구별이 없다면, 과연 이 세계는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조금만 비관적인 생각에 빠지게 된다면, 우리가 사는 세계는 영원히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악몽에 불과하다고 여길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장자의 이야기를 살펴봐야 합니다. 장주가 나비가 된 것이 꿈임을 알았던 이유는 그 꿈에서 문득 깨어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점은 꿈은 대게 ‘깨어나서야’ 그것이 꿈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꿈에서 깨어나기 전에는 내가 나비가 아님을 알기 어렵다는 것이죠. 그런데 장자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방금 나비가 된 꿈에서 깨어났지만 그 꿈에서 깨어난 상태 즉, 장주 자신의 현실도 꿈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죠.      


장자는 현실 또한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고, 이것은 곧 '다시 한번 깨어났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장자는 결국 ‘두 번 깨어난 것’이죠. 우리는 호접지몽 이야기에서, 꿈속에서 장주와 나비의 구별이 없었다는 대목에만 주목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은 이 두 번의 꿈 깸이 장자가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의 요체입니다. ‘크게 깨어나라’는 겁니다.     



夢飮酒者 旦而哭泣 夢哭泣者 旦而田獵

몽음주자 단이곡읍 몽곡읍자 단이전렵

方其夢也 不知其夢也 夢之中又占其夢焉 覺而後知其夢也

방기몽야 부지기몽야 몽지중우점기몽언 각이후지기몽야     


꿈속에서 유쾌하게 술을 마신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면 울게 되고,

꿈속에서 구슬프게 운 사람은 사냥놀이 갈 일이 생긴다네.

한창 꿈을 꾸고 있을 때에는 그것이 꿈인 줄도 모르고

또한 꿈을 이리저리 풀어 보다가 꿈에서 깨어난 뒤에야 꿈인 줄 알지.


且有大覺而後知此其大夢也

차유대각이후지차기대몽야

而愚者自以爲覺 竊竊然知之 君乎牧乎固哉 丘也與女

이우자자이위각 절절연지지 군호목호고재 구야여여     


우리네 삶은 이와 같아서  진정한 깨달음이 있어야 삶이 한바탕 꿈속인 줄 알게 되지.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깨달았다고 자처하여 짐짓 아는 체하면서, 왕입네, 재상입네 과시하려 들지. 참으로 어리석구나, 공자여!

- 『장자莊子』, 내편內篇 제물론齊物論


4.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마치 장자의 가르침을 따르기나 하는 것처럼 코브는 단호하게 림보로부터 빠져나오게 됩니다. 림보로부터 빠져나왔다는 것은 코브가 영원한 시간을 버리고 현실을 선택했다는 것을 보여주죠. 아무리 영원할지라도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겁니다. 꿈에서 빠져나온 그는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아이들을 껴안게 되고, 토템은 멈출 듯 말 듯 돌며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인셉션의 마지막 장면, 멈출듯 말듯한 토템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우리의 궁금증은 그치지 않습니다. 과연 코브는 꿈에서 빠져나온 것이 맞을까요? 꿈에서 빠져나왔다고 해도 코브의 현실이 꿈과 다르다고, 코브가 모든 꿈에서 깨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현실 또한 림보처럼 의식이 존재하고 서로 간의 대화가 가능할 뿐, 거대한 꿈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그 꿈이 끝나는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진정한 깨어남의 세계는 아닐런지요. 우리는 세계가 시간과 함께한다고 여기지만, 영원한 시간이 환상인 만큼 시간 그 자체도 우리의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직도 ‘시간’에 대해서 우리는 할 말이 많은 것 같습니다.


※ 장자의 호접지몽에 대한 해석은 오강남 교수님('장자'/현암사)의 견해를 참고하였습니다.



위 내용을 영상화하여 유튜브에 업로드하였습니다. 영상의 분위기와 함께 내용을 접하시면 더욱 느낌 있게 내용이 다가오실 것 같습니다. 영상을 보시고자 하는 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https://youtu.be/YPfhTNopk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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