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글을 쓰는 시간이 새벽 3시를 달려가고 있다. 최근까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생활 패턴을 유지했지만, 시나리오를 내 기준으로 끝내고 나서 소심한 일탈 중이다. 오랜만에 브런치에 들어와서 알림을 열어보니 메시지가 와 있다. 1월 22일 기준으로 들어오지 않은 날이 330일. 지금은 5월 마지막 주니까, 1년은 넘었다는 소리다.
근황을 이곳에 푸는 게 웃기긴 하는데, (보는 사람이 거의 없으므로) 나 스스로 머릿속을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이렇게 쓴다.
21년 10월 말부터 시작했던 시나리오는 22년 10월 말에 초고를 마무리했다. 10년의 경력단절을 뚫어주길 바라며 10년 만에 장편 시나리오를 탈고했다는 뽕에 취해 2달을 보냈다. 2달 뒤 꺼내본 초고는 역시였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지만, 글은 역시 초고부터 시작이다. 온라인 게임 캐릭터 육성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만렙부터 게임 시작인 것이다. (잠깐, 근데 브런치 폰트 왜 이렇게 마음에 안 들지? 쓰면서 폰트를 어떻게 바꾸는지 메뉴를 스캔 중이다.) 초고는 Ver 4.0까지 나왔다. (폰트를 방금 나눔 명조로 바꿨다. 이제 글 쓰는 느낌이 좀 난다.)
글은 리듬이 있어야 써진다. 10년의 세월 동안 긴 글을 쓰지 않았다. 리듬이 개박살 났다는 이야기다. 나는 글을 쓸 때, 쓰려고 하는 글의 리듬과 같은 음악을 찾아서 들어야 글이 써진다. 꽤 많은 작가나 감독님들이 비슷한 루틴을 가지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얼마 전에 읽은 '김호연의 작업실'이라는 작가님의 에세이에서도 김호연 작가는 자기의 글쓰기용 배경음악 모두를 공개하시기도 했다. 아무튼 어떤 이야기를 써야지 하고 결정하고 노래선정에 꽤 공을 들인다. 딱히 정해진 것은 없지만, 한 가지 기준이 있다면 가사가 없어야 한다. 영어를 잘 못하지만 팝송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글을 쓰는데 자꾸 누가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아서 집중이 안된다. 주로 듣는 것은 연주곡이다. 유명한 곡, 안 유명한 곡. 가리지 않는다. 내가 써지기만 하면 최고다. 4고를 마무리한 것이 바로 이틀 전이다. 그러니까 만 1년 7개월 정도, 햇수로 2년 걸렸다. 2년 동안 선택된 연주곡만 들었다. 굳은 내 머리를 학습시키는 과정이다. 10년 전에는 아이가 없어서,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이야기를 머릿속에 넣고 돌려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가 둘인 지금은 깨어 있는 동안 나의 뇌는 용량초과가 이미 되어 있는 상태다. 선정된 음악을 들어야 후두엽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나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 (아..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자다가 일어나서 컴퓨터를 다시 켠 게 아닌데....) 그러니까 10년 만에 시나리오를 써서 기분이 좋으면서 불안하면서도 그렇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글을 쓰는 동안, 엄마가 암판정을 받았다. 자궁내막암. 그냥 기분이 내 탓인 것 같다. 하늘이 도왔는지 암세포 녀석은 자궁내막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담당쌤이 자궁 및 난소 적출을 하고 깔끔하게 제거 됐다고 하셨다. 항암이나 방사선 등의 추가 치료를 하지 않고 3개월 간격으로 관찰만 해도 될 것 같다고 하셨다. 평소에 죽음에 대해 아주 쿨한 반응을 보이셨던 엄마는 암이라는 놈이 당신의 아랫배에 있다는 첫 진단에 죽음이라는 두 음절의 단어가 얼마나 우리 곁에 가까이 있는 것인지 새삼 느끼시는 듯했다. 물론 나도 그렇고.
이틀 전에 시나리오를 털었다고 했는데, 이틀 전에 국내에서 꽤나 큰 시나리오 공모전에 응모를 했다는 뜻이다. 나는 시나리오를 써달라는 곳도 없어서 마감시간이 없다. 스스로 마감을 해야 하는 입장인데 3고 이후에 시간만 가고 있었다. 나름대로의 마감시간을 만들고자 공모전을 선택했고 마지막날 새벽에 파일을 업로드했다. 파일을 업로드하자마자 만 5세인 둘째가 (딸이다) 아프다고 일어났다. 이마에 손을 대어 보니 뜨겁다. 체온계로 재보니 39.9다. 뭐지? 부랴부랴 상비하고 있던 해열제를 먹였다. 이마에 물수건을 갈아주면서 1시간을 보냈다. 아이가 잠이 들고 나도 잠이 들었다. 이른 아침에 아내가 깨운다. 아이가 또 40도라는 것이다. 아이를 들쳐업고 응급실에 가서 해열주사를 맞았다. 아이는 아침부터 날벼락같은 주사를 맞고 운다. 열이 떨어졌는데도 38도대. 8시가 좀 넘어서 집 근처 소아과에 가서 접수하고 대기를 시작했다. 열이 있음에도 컨디션이 좋아졌는지 로비에서 뛰어 다닌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난 이 처량한 (사실 처연한 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다. 주인공이고 싶거든) 나의 모습을 언젠가 작품 속에 투영시키라는 마음으로 나의 뇌를 돌려 기억이라는 것을 하게 명령했다. (하지만 나의 뇌는 아주 독립적이다. 기억을 할지는 살면서 합의를 봐야 한다.)
시나리오를 털고 나니 브런치에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게 나의 머리의 한계다. (3시가 넘었다. 낼 아침에 아이들 아침을 챙겨줘야 하는데 일어나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 시간이다.)
공모전의 결과는 몇 개월 후다. 기다리면서 다른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쟁여놔야지. 공모전에 큰 기대는 없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이 공모전은 기성작가와 아마추어가 다 댐비는 공모전이다. 영화 시나리오만 받는 것도 아니고, 드라마 대본만 받는 것도 아니며, 문학소설만 받는 것도 아니다. 다 받는다. 여기까지 보고 어떤 공모전인지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나는 이렇게 본격적으로 글을 쓰게 될 줄 몰랐다. 영화일도 조금 늦게 시작하긴 했지만, 나는 영상에 대한 연출을 생각했었다. 그렇다 보니 글을 각 잡고 쓴 것도 꽤 나이를 먹고 시작했다. 책은 읽긴 했지만 창작을 하는 것은 또 별개이니까. 모든 문화는 결국 글에서 시작된다. 모든 예술이 그렇다. 미술은 붓이라고 생각하는가? 오산이다. 모든 것의 인풋의 대부분은 (여기서 굳이 퍼센티지를 넣자면 94.32%) 문자다. 글이다. 그래 꾸준히 하다 보면 조금씩 는다. 그래서 재미를 느낀다. 훌륭한 작가님들이 많은 것을 알기에 공모전에 당장 되지 않더라도 (사실은 상금이 필요하다. 생활비 때문에) 나의 성장에 재미를 느끼고 있다. 얼마 전에 봉준호 감독님이 해외 영화제에서 인터뷰하는 영상을 보았다. 외국 평론가가 어떻게 그렇게 꾸준히 시나리오가 나오시냐고 물었다. 봉감독님이 이렇게 답했다. "제 일이잖아요." 그렇다.
이제 시나리오를 털었으니 한 달 정도는 읽고 싶어도 참으면서 쌓아놨던 책을 좀 몰아볼까 싶다. 그럼 전 이만 자러 가야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둘째가 열이 없기를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