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징크스를 믿는 진짜 이유
실패가 반복되면, 이성보다 전설을 믿고 싶어진다.
1. 밤비노의 저주 – 야구보다 무서운 믿음의 힘
보스턴 레드 삭스는 1918년 월드시리즈 우승 이후, 무려 86년간 우승하지 못했다. 그 원인으로 지목된 건 놀랍게도 선수도 감독도 아닌, ‘저주’였다.
1920년, 팀이 전설적인 타자 베이브 루스를 라이벌 뉴욕 양키스에 트레이드한 후부터 기묘한 불운이 시작됐다는 것. 그 이름도 유명한 “밤비노의 저주(Curse of the Bambino)”.
그 이후 레드 삭스는 결정적 순간마다 고꾸라졌다.
1986년에는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단 한 아웃만을 남겨두고, 평소 실책이 거의 없던 1루수 빌 버너가 평범한 땅볼을 다리 사이로 빠뜨리는 바람에 역전패.
1999년에는 연장 끝에 심판 판정 논란으로 탈락.
이쯤 되면 팬들도, 선수들도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에 사로잡히기 시작한다.
“우린 결국 또 지겠지…”
“이건 그냥 운명이야…”
여기엔 심리학적 이유가 있다.
사람은 불확실성을 싫어한다. 이해할 수 없는 패배가 반복되면, 우리 뇌는 원인을 만들어낸다. 저주든, 불운이든, 이유가 있으면 불안은 줄어드니까.
그리고 반복된 기대와 좌절은 뇌를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 상태로 이끈다.
스스로 실패를 예측하고, 그 예측에 맞춰 행동하며, 결국 그 예언을 현실로 만든다. 이게 바로 자기 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다.
2. 슈퍼맨의 저주 – 무대 밖에서 진짜 힘든 싸움
이야기는 스포츠에서 끝나지 않는다. 할리우드에도 저주 전설은 존재한다. 대표적인 게 바로 ‘슈퍼맨의 저주’다.
조지 리브스(1950년대 슈퍼맨): 미스터리한 총기 사고로 사망. 자살이냐 타살이냐를 두고 여전히 논쟁 중.
크리스토퍼 리브(1978년 슈퍼맨): 승마 사고로 전신 마비. 이후에도 계속되는 건강 악화와 사망.
브랜던 루스(2006년 슈퍼맨 리턴즈): 이후 커리어가 급격히 하락.
헨리 카빌조차 완전히 캐릭터에서 벗어나지 못해 여러 작품에서 고전했다.
이쯤 되면 사람들은 말한다.
“슈퍼맨 역할을 맡으면 인생이 꼬인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사실은 이렇다. 너무 유명한 캐릭터를 연기하면, 배우 본인의 이미지가 그 역할에 잠식된다. 관객도, 제작자도 그 배우를 다른 역할로 보기 어렵다.
이른바 ‘역할 고착화(Role Enclosure)’ 현상이다.
이는 배우에게 강한 심리적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커리어 선택의 폭을 줄인다. 그로 인해 우울, 불안, 정체성 혼란 등 심리적 부작용이 따라오게 된다.
저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건 이미지와 기대의 무게다.
3. ‘너 오늘 머리 자르지 마’ – 일상 속 징크스의 실체
“왼쪽 발부터 신발 신으면 시험 망해.”
“시험 날에는 그 펜 쓰지 마.”
“같은 엘리베이터 타면 꼭 일이 꼬여.”
이런 말, 우스갯소리 같지만 진지하게 따지는 사람들 많다. 우리 일상도 사실 징크스로 가득하다.
왜 우리는 이런 것들을 그렇게 믿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뇌가 무작위성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뇌는 ‘패턴을 찾는 기계’다. 패턴이 없으면 불안하다.
그래서 인과관계가 없는데도 우연한 반복을 의미 있는 연결로 착각한다. 이를 ‘착각된 상관관계(Illusory Correlation)’라고 한다.
또한 징크스를 믿는 것은 일종의 심리적 통제감(Illusion of Control)을 주기도 한다.
불안한 상황에서 “내가 뭔가 할 수 있다”는 감각은 위안을 준다.
예를 들어, 운동선수가 경기 전에 꼭 같은 루틴을 반복하는 것도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심리적 안정’을 위한 자기 조절 전략이다.
그게 실제 경기력을 끌어올릴 수 있다면, 과학적이지 않아도 충분히 유효한 것이다.
4. 저주는 어떻게 현실이 되는가?
정리하자면 이렇다.
징크스란 실패와 불안에 이름을 붙여주는 이야기다.
그 이야기엔 심리학의 온갖 장치가 숨어 있다:
자기 충족적 예언 – 질 거라고 믿으면 실제로 진다.
확증편향 – 실패한 사례만 기억하고, 성공한 건 무시한다.
무작위 공포 – 원인을 모르는 실패가 더 무섭다.
통제감 착각 – ‘내가 뭘 하면 결과가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믿음.
그렇다면 저주를 이기는 방법은 무엇일까?
결국 마인드셋이다. 2004년, 마침내 저주를 끊고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한 레드 삭스. 그들은 단지 실력을 갖춘 게 아니라, 자신들이 믿고 있던 ‘저주의 스토리’를 버렸다.
팀워크, 자신감, 그리고 불안에 지지 않겠다는 집단적 멘털이 이긴 것이다.
마지막으로, 징크스는 귀신도 아니고, 저주도 아니다.
그건 우리 안의 불안이 만든 심리극이다.
우리가 믿는 만큼, 그것은 실제가 되고,
우리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징크스를 이기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내가 이 이야기를 끝낼 거야”라는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