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키신저 저 <Diplomacy> 서평
유럽의 역사를 한 단어로 정리하자면 ‘역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많은 나라들이 패권(헤게모니)을 장악하기 위해 끊임없는 경합을 벌여왔던 유럽은 로마시대 이래 단 한번도 단일국가에 의해 통일된 적이 없는 각축장이었다. 이와 같은 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서로 전쟁을 벌이고, 동맹을 맺고, 협력하거나 배반하면서 자국의 안보를 지키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
유럽의 외교사를 잘 정리한 책으로 헨리 키신저의 ‘외교(Diplomacy)’를 꼽을 수 있다. 국무장관을 역임한 저명한 외교학자 헨리 키신저가 쓴 이 책은 미국의 대표적인 외교도서로 유명하다. 그러나 방대한 분량과 난해한 뉘앙스 때문에 아직까지 한국어로 번역되지 못하고 있다(2011년도에 국문판 발간 시도는 있었다).
15세기부터 냉전시대까지 다루는 ‘외교’의 내용 중에서도 기발한 외교술을 소개한다. ‘신의 한 수’와 같은 전략과 전술로 전세를 뒤집고 외교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다음 이야기들은 외교뿐 아니라 개인간, 기업간 등 다양한 관계에 있어서 응용이 가능하다. 물론 새로운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를 상대해야 할 우리나라에는 최우선적으로 ‘외교’ 전략과 전술을 위해 이 책이 필요해 보인다.
“신이 실로 존재한다면, 리슐리외 추기경은 그의 수많은 행동들에 대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글쎄, 그 추기경은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교황 우르바노 8세)(필자 번역).”
(책 ‘Diplomacy’, 헨리 키신저 저)
리슐리외 추기경은 17세기에 프랑스 루이 13세를 보좌했던 재상으로 프랑스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그의 업적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하늘에는 유일신, 지상에는 유일국가(본래 카톨릭 교리 아래 통합된 국가들을 통칭하나 당시에는 합스부르크 왕가를 지칭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음)라는 중세의 보편철학(universality)을 철저히 파괴한 것이다. 둘째는 처음으로 ‘국익’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체제를 만들어낸 것이다.
당시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세력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다. 프랑스 남쪽에는 스페인, 동쪽에는 신성로마제국을 지배하고 있던 합스부르크 왕가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다. 이 때 리슐리외는 당시 독일 여러 공국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고 있던 종교개혁운동을 이용하기로 한다. 때마침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카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독일 공국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리슐리외는 이 싸움에서 몰래 독일 공국들을 지원하여(카톨릭 추기경이 개신교도들을 지원한 것이다!) 단기간에 신성로마제국의 승리로 끝났을 이 전쟁을 무려 30년동안이나 질질 끌게 한다.
‘30년 전쟁’으로 역사에 기록된 이 싸움 끝에 합스부르크 왕가와 독일 공국들은 지칠 대로 지쳐버렸으니, 자연스럽게 프랑스는 이 전쟁의 최대 수혜자로 강대국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와 같이 리슐리외는 종교를 철저히 배제하고 오로지 프랑스의 국익만을 추구한다는 ‘국가이성(raison d’etat)’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하였고, 30년 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현대 국가체제의 기반을 세웠다. 또한 태양왕 루이 14세를 거쳐 나폴레옹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찬란한 황금기가 된다. 게임이 마음에 안 든다면, 리슐리외처럼 게임의 룰을 바꿔 보는 방법이 있다.
“비엔나회의 이후 유럽은 가장 오랜 기간 동안 평화를 누렸다. 40년동안 열강들이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았으며, 1854년에 발발한 크림 전쟁 이후에는60년동안 전면전이 터지지 않았다(필자 번역).”
(책 ‘Diplomacy’, 헨리 키신저 저)
메테르니히는 19세기 오스트리아의 외교관으로, 무너져가는 합스부르크 왕가를 섬기며 강대국으로서 오스트리아의 역사적인 지위를 지키고자 노력한 인물이다. 헨리 키신저의 외교관(観)에 특별히 많은 영향을 주었고, 그만큼 책 속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한 후 앞으로의 전쟁을 막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유럽협조체제를 확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이를 위해 그가 발휘한 외교술이 주목할 만하다.
우선 유럽협조체제가 잘 작동될 수 있도록 4국 동맹(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 영국)과 신성동맹(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을 맺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국가들로 하여금 그 이해관계의 ‘차이점’보다 ‘공감대’에 주목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그 공감대로서 4국 동맹에게는 ‘프랑스가 재기할 수 있는 위험성’을 인지시켰고, 신성동맹에게는 ‘현상유지’를 알렸다(즉, 나폴레옹이 퍼뜨린 공화주의 운동을 막고 왕정을 수호하며 민족주의를 척결하고 남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따라서 이 공감대가 이들 동맹이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도록 도왔다. 결과적으로 메테르니히는 유럽협조체제를 성사시킴으로써 오스트리아를 기준으로 서쪽으로는 프랑스의 위협을 4국 동맹으로 해소하고, 동쪽으로는 신성동맹의 ‘현상유지’의 원칙에 따라 러시아의 영토적 야심을 묶어두었다. 또한 남쪽으로도 신성동맹의 기심으로 거세지고 있던 민족주의를 마음껏(?) 억압하며 들어선 오스트리아 제국은 메테르니히 덕분에 그 생명을 조금이나마 연장시켰다.
“영국 정치인들은 행동의 자유를 고집하면서 원칙적으로 집단안보 및 그와 유사한 형태의 모든 개념을 거부했다. 이후 ‘영광의 고립’으로 알려진 영국의 이와 같은 정책은 동맹을 통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는 영국의 믿음을 반영하고 있었다(필자 번역).”
(책 ‘Diplomacy’, 헨리 키신저 저)
영국은 행동의 자유를 선호한다. 예부터 유럽 대륙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개입하는 것을 싫어했다. 잘못 손 댔다가 대륙 정치에 손발이 묶여버리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국은 자연스럽게 해외 식민지 개척에 몰두하게 되었고, 대륙 정치에는 중대한 세력변화가 발생하지 않는 한 관여하지 않았다.
이러한 고립정책 덕분에 유럽 대륙의 평화 유지에 기여하였다. 즉, 나폴레옹처럼 유럽 대륙의 패권을 노리는 자가 등장하면, 영국은 이를 막기 위해 상대 진영에 가담하여 ‘든든한’ 파트너가 되었다. 그러다 다른 나라가 위협을 시도하면, 어제의 적이었던 프랑스와도 오늘의 동맹국으로서 함께 싸울 수 있는 ‘뻔뻔한’ 나라이기도 했다. 이같이 철저한 ‘세력 균형자(balancer)’로서 영국은 유럽 대륙의 평화에 일조하면서도, 유럽 방방곡곡에서 터지는 국지전이나 소모적인 사건 따위에 신경 쓸 필요가 없이 국가 발전에 몰두하였다. 모든 조건들이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한 고도의 기술력, 강력한 해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탄생 등의 밑거름이 된 셈이다.
그런데 고립정책은 어느 날 특정 인물이 고안해 내지 않았다. 영국의 역대 정치인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꾸준히 만들어낸 정책이다. 이 고립정책이 유난히 돋보이기 시작한 시점은 외무상 조지 캐닝이 메테르니히가 이끌었던 유럽협조체제에서 완전한 퇴장을 선포했을 때부터다(캐닝의 전임 외무상은 유럽협조체제에 우호적인 카슬레이였는데, 서로 얼마나 싫어했는지 과거에 총 대결을 벌였을 정도였다). 고립정책은 조지 캐닝 이래 파머스턴, 살리스버리, 더비 등 여러 외무상을 거치면서 더욱 구체화되었으나, 세계 대전 이후 미국과의 공조 관계를 맺으면서 후퇴하였다. 그러나 최근 ‘브렉시트(Brexit)’로 알려진 바와 같이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영국의 고립주의 정책의 부활이 암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