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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큰고을 Oct 22. 2024

나의 바르트

  나의 바르트     


  흑백 사진 속에는 대여섯 살의 여자아이가 강아지를 꼭 끌어안고 있다. 내가 애초부터 개를 멀리했던 것은 아니었나 보다. 강아지의 이름은 바르트였다. 바르트라는 이름의 연유나 어떻게 키우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누렇게 변한 사진처럼 퇴색된 기억 속에는 마당가가 바르트의 집이었는데 추운 겨울날도, 더운 여름날도, 비 오는 날 등등 주로 마루 밑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처럼 사료가 아닌 먹다 남긴 음식이 바르트의 밥이었고, 집이 비거나 한밤중을 지키는 게 주 임무였던 똥개였다. 흔히 모든 개들처럼 식구들의 발자국 소리에 예민했다. 어둑어둑해 질 무렵 바르트의 기척으로 가족들의 귀가를 알 수 있었다. 또 김을 매는 할아버지를 찾으러 갈 때나 요즈음처럼 더운 여름날 개울가 갈 때 졸졸 따라 다니던 보디가드였다. 그러나 애틋했던 감정은 시간 속에 묻혀 버리고 바랄대로 바래 희미해졌다. 사진을 들여다보니 내가 바르트를 많이 귀여워했구나하고 느껴졌다.      

  예전에는 여름이 시작 되면 큰 자전거에 닭장처럼 생긴 상자를 싣고 “개 삽니다” 를 외치며 돌아다니는 아저씨들이 있었다. 나의 바르트도 그런 아저씨한테 팔려갔다. 자신의 운명을 잘 아는 듯 했다. 가기 싫다고 버둥거리며 질질 끌려갔다. 검은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살려 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렁그렁 눈물이 고여 있던 바르트의 눈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힘없는 꼬맹이로 팔려 가는 것을 지켜 볼 뿐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지켜줄 수 없으면 정들지 말아야한다는 비장한 감정이 자라고 있었나보다. 바르트로 인해 본능적으로 개를 멀리하게 된 것 같다.

  아이들이 강아지를 키우자고 무던히도 졸라댔다. 말은 힘들어서 안 된다고 했지만 이면에는 정들까봐 걱정스러워서,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까봐 무서웠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골목길에 유기견 한 마리가 지나가는 사람들 눈치를 보며 킁킁댄다. 얼마나 오랫동안 방치 되었는지 회색빛 털이 눈까지 덮여 있다. 아마 한 때는 반려견으로 솜처럼 하얀 빛의 털과 애견센터에서 단아하게 다듬은 자태를 뽐낼 때도 있었을 텐데. 무슨 사연으로 거리의 부랑자가 되어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을까.

 나는 거리의 부랑자가 쫓아오기라도 할까봐 힐금거리며 빠르게 걸었다. 속으로 ‘나 강아지 싫어하거든. 제발 쫓아오지만 말아라.’ 라고 중얼거리면서.

  휴가기간이 끝나고 나면 평소보다 두 배나 많은 개들이 버려진다고 한다. 반려견으로 사랑과 관심을 받다가 유기견이라는 다른 이름을 갖게 되면 유기견 보호센터로 가게 되고 열흘 안에 주인도 못 찾고, 분양도 안 되면 안락사 시킨다고 한다.     

  어떤 대상을 사랑하든지 책임이 따른다. 책임진다는 것은 귀찮고 번거롭다. 양보도 필요하고 참아야할 것도 많다.

  또 다른 바르트들의 그렁그렁 눈물 고인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은데. 진정으로 관심을 갖고 살뜰하게 보살피는 일은 어려운 일인가 보다.

  존 그로건은 말했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나쁜 주인만 있을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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