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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리학자 J Jan 26. 2019

장려한 장미처럼

빈스 과랄디의 음악과 피고 지는 삶의 순간에 대하여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뒤에는 모든 것이 있었고 또한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 쪽으로 가고자 했지만 동시에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을 여는 첫 문장들이다. 이 글에서 내가 하려고 하는 이야기와 소설 내용은 전혀 상관없겠지만 이 문장만 놓고 보면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 (San Francisco Bay Area)에서의 지난 내 1년의 삶을 잘 그리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이곳에서의 삶은 어떤 면에서는 최고의 시절이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최악의 시절이었다. 개인적인 일로 부침이 있었고, 언어와 문화가 다른 곳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고,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연구를 해서 결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그런 반면 나는 이곳에서 나를 지지해주는 새로운 친구와 동료를 만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지난 1년의 나는 지혜와 어리석음, 믿음과 의심, 빛과 어둠, 봄과 절망 그 사이를 끊임없이 갈팡질팡했다.


골든 게이트 브릿지 (직접 촬영)

어쩌면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이라는 곳의 분위기 자체가 내가 그런 양면적 삶을 살 것임을 예고했는지도 모르겠다. 샌프란시스코는 무척 아름다운 곳이지만 그만큼 쓸쓸한 곳이기도 하다. 캘리포니아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에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은 주로 화창한 편이다. 그러나 습기를 머금은 바다의 찬 바람이 따뜻한 땅을 만나 샌프란시스코에는 수시로 안개가 내려앉는다. 때문에 샌프란시스코는 캘리포니아 특유의 화창함과 바다 안개로 인한 우수를 동시에 갖춘 역설적인 도시가 된다.


샌프란시스코의 그런 양면성은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상징일 수도 있다. 이곳에서의 내 삶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도시를 포함한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상징. 큰 꿈을 안고 많은 사람들이 다른 주에서, 다른 나라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실리콘 밸리로 몰려 오지만 그들 중 많은 수가 동시에 간이역에서 잠시 머무르는 여행객처럼 샌프란시스코 이후의 삶을 생각한다. 그들에게 이곳에서의 삶은 찬란하고 눈부시지만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임을 그들 자신은 잘 알고 있다. 살인적인 생활비 때문일 수도 있고, 먼 곳에 두고 온 가족들 때문일 수도 있고, 직장 사정 때문일 수도 있다. 내 경우에는 직장 사정에 해당할텐데, 대학에서 일하는 포닥(postdoctor)인 나에게는 이 도시의 유동성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같이 일하던 대학원생은 졸업하고, 동료 포닥은 몇 년 새에 금세 자리를 옮기고, 방문 학자나 방문 학생들은 한 두 학기면 떠난다. 그들이 떠난 만큼 새로운 사람이 그 빈자리를 채우겠지만 한 명 한 명을 보낼 때마다 그들에게 준 정 때문에 마음 한 구석이 쓸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장려한 장미처럼 

빈스 과랄디의 재즈 곡 <Like a mighty rose>

빈스 과랄디 (Vince Guaraldi)는 1960~70년대에 활동했던 샌프란시스코 출신의 재즈 피아니스트다. 굳이 따지자면 그는 재즈 역사에서 마일즈 데이비스나 찰리 파커처럼 중요한 이름은 아니다. 그는 <Cast your fate to the wind>라는 곡으로 그래미 상을 받았고 피너츠 단편 애니메이션 <Charlie Brown Christmas>의 음악을 담당해서 큰 인기를 얻어 웨스트 코스트 재즈 (west coast jazz)에서 중요한 이름이 되기는 했지만, 재즈 팬 중에선 그를 아는 사람보다는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만큼 샌프란시스코의 정취를 잘 살린 재즈 음악가는 없다고 생각한다. 따뜻하고 편하지만 어딘가 쓸쓸한 느낌을 주는 그의 음악은 샌프란시스코와 맞닿아 있다.


그의 전성기는 그렇게 길지 않았다. 60년대에 큰 성공을 얻었지만 70년대가 되어 그의 인기는 시들어 버린다. 게다가 그는 1976년 47세에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죽고 만다. 어쩌면 그의 죽음은 LA와 샌프란시스코 중심의 웨스트코스트 재즈가 빠르게 몰락했던 것과 같은 궤적 위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샌프란시스코의 전설적인 재즈 클럽 "Black Hawk"가 1963년 문을 닫은 것은 웨스트 코스트 재즈의 몰락의 전초 증상이었을 뿐이었다. (그 뒤로 건물이 헐려 지금 그 위치에는 명패만이 "Black Hawk"가 그 자리에 있었음을 알려줄 뿐이다.) 그 이후로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는 작은 재즈 클럽만이 존재했고, 빈스 과랄디는 그런 작은 재즈 클럽에서 연주를 이어나갔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그런 작은 클럽들 중 하나인 "Butterfield's Nightclub"에서 생의 마지막 연주를 하고 근처 작은 호텔에서 돌연히 사망한다.


장미의 운명 또한 그럴지도 모른다. 꽃은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던, 한철 화려하게 피었다가 금세 지고 만다. 1년의 대부분을 초라하게 보낼지라도 장미가 장미인 것은 그것이 장려하게 활짝 피는 계절이 있기 때문이다. 빈스 과랄디의 삶이 그랬고, 샌프란시스코의 삶이, 학계에서 포닥의 삶이, 더 나아가 모든 삶이 그럴지도 모른다. 아름답게 활짝 피지만 그것이 결코 영원하지 않은 삶. 언젠가 끝이 정해져 있는 그런 삶이지만 그렇기에 아름다운 것일지도 모른다. 유한한 장려함.


SFMOMA 맞은편에서 (직접 촬영)


지극한 아름다움은 그것이 피어나는 순간에 시간의 흐름조차도 멈추게 한다. 결국 시간은 다시 흐르고 지극한 아름다움 조차 시간이 흐르면 흐려지고 잊히지만, 아름다운 장미가 장려하게 펼쳐졌다는 사실만은 결코 퇴색되지 않는다. 나는 샌프란시스코의 삶이든, 서울의 삶이든, 삶의 그 모든 순간순간이 장려한 장미처럼 활짝 피기를 바란다, 비록 그 장미가 봄이 지나면 질 운명이더라도 그 순간이 영원인 것처럼. 그러면 그 순간이 찬란하게 존재했다는 사실만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 빈스 과랄디에 대해 읽을 만한 네이버 포스트와 영어 아티클을 소개한다 (네이버 포스트 링크, 영어 아티클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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