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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연 May 10. 2023

시장으로 간 성폭력 - 김보화

시장으로 간 성폭력

김보화


최근 많은 사람의 공분을 산 뉴스가 있다.

룸카페서 12세 여아 성폭행한 男 집행유예…왜?

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230504/119139917/2

내가 아는 상식으로 13세 미만의 아동을 성폭행 한 경우엔 '13세 미만 의제강간'으로 훨씬 무거운 처벌을 받아야 하는데, 이 경우에는 집행유예에 그쳤다. '죄질이 무겁'지만 '반성하'고 있고 '초범'인데다가 '피해자와 합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단 이뿐만 아니다. 열세 살 지적 장애가 있는 아동이 성폭행을 당하고서 떡볶이를 얻어먹었다는 이유만으로 성폭행이 아니라 '성매매'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하루라도 뉴스를 보며 속이 답답하지 않을 날이 없었다.

거기다가 각종 성범죄 전담 법인의 무수한 광고들은 과연 이 나라가 누구를 위해 굴러가는지를 잘 보여준다고밖엔 표현할 길이 없다.


<시장으로 간 성폭력>은 현재 우리나라의 이런 구조를 피해자, 조력자, 그리고 법조계 관계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낱낱이 기록하고 밝히는 책이다. 읽으면서 이토록 잔잔한 분노를 일으키는 책도 없었던 것 같다. 어떻게 사법부가 성범죄 가해자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지, 그리고 이를 자본주의/신자유주의가 어떻게 잘 요리하고 있는지를 볼수록 점점 더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굳어졌다.


P. 138. 소비자로서의 가해자와 시장화된 성범죄 전담법인, 그리고 산업화되는 전문가 그룹들이 가해자 카르텔을 구성하면서 성폭력은 점차 정치적인 것에서 경제적인 것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가 가지는 문제점의 근간에는 '정치적'으로 해결해야할 것을 경제적으로 해결하려는 데 있다.

법안을 상정하고 법에 따라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은 명백히 정치적인 의제다. '성범죄는 나쁘다'는 인식을 사람들에게 주입하기까지도 짧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성범죄를 저질렀으면 정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까지 가는 것도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특히나 '억울한 가해자로 몰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한국 사회에서는 퍽 요원해 보인다.

이 틈새를 성범죄 전담법인이 파고든다. 이들은 '억울하게 가해자로 몰린' 이들을 비호할 뿐만 아니라, 그 억울한 사람들에게 '역고소'를 제안하기까지 한다. (변호사 윤리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하는데도) 그러면 국선변호사를 쓰던 피해자들도 역고소에 대항하기 위해 사선 변호사를 쓸 수밖에 없게 되는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책을 읽으며 내가 과거에 당했던 성범죄들을 떠올렸다. 내가 당한 그 어떤 범죄도 나는 감히 '고소/고발'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는 것이 그 첫 번째이고, 운이 좋으면 가해자가 인정하고 금방 끝이 나겠지만, 운이 나쁘다면 몇 년을 법정공방에 나를 갉아먹으며 지내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 캄캄한 앞길이 두려운 것이 두 번째다. 물론 내가 입은 피해를 입증하는 게 어려운 건 또 별개의 문제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그대로 묻어두는 것이었다. 굳이 꺼내어 긁어부스럼 만들지 않고, 입을 닫고 있는 것. 가해자와 영영 관련 없는 삶을 사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나마 나는 그 시간과 장소, 가해자와 멀리 떨어져 지낼 수 있는 선택권이 있었다. 이런 것도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내가 묻어둔다고 해서 이미 발생한 일이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다. 고소하는 것을 제외한 다른 방법들로 혼자 해결을 했을 뿐이다.

다양한 피해자들은 다양한 선택을 한다. 형사고발을 하기도 하고, 또 공론화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선택이 역풍을 맞는 걸 보게 되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은 내 과거의 선택이 나에게 옳은 것이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나는 그 역풍을 견뎌낼 자신이 없으니까.


내내 답답해하며 읽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과연 이 상황의 해결책은 존재하는지도 의문스러웠다.

책의 마지막 챕터에서 제시하는 해결책 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여성주의 단체에 지속적인 관심을 주며 성범죄 의제를 정치화하는 데 힘을 보태는 것 정도였다. 그러니까 앞서 인용한 사건에 분노하며 피해자에게 연대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 말이다.


때로 현실은 너무 버겁다. 성범죄 피해자들에게는 더더욱. 그럼에도 '피해자다움'의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피해자들을, 나를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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