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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연 Sep 28. 2023

저주 토끼 - 정보라

저주 토끼

정보라


맨부커상 후보작에 올랐던 작품을 뒤늦게야 읽었는데, 채식주의자를 읽었던 때가 떠올랐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깊은 울림이 있던 소설, 저주토끼도 그랬다. 짧지 않은 단편들로 엮인 소설집,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 마음 한 구석을 두드렸다.

솔직히 완독한 것이 7월이라 거의 세 달 가까이 지난 지금은 세세한 내용이 어땠는지 가물가물해서 리뷰를 쓰기 좀 머쓱하다.



<저주 토끼>

한때 즐겨 보던 일본 애니메이션 '지옥 소녀'가 있다. 누군가를 저주하는 마음이 크면 지옥 소녀가 나타나서 저주하는 대상을 지옥으로 보내주는데, 유명한 대사 중에 '남을 저주하면 무덤이 두 개'이 나온다. 이게 소설에 그대로 나와서인지 그 애니메이션을 보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사람을 미워한다는 것은, 사람을 저주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내 자신의 마음도 파괴하는 일이다.

저주 토끼는 작고 귀여워서 파괴력이 없어보이지만 결국 모든 것을 갉아먹고 저주를 내린 화자의 할아버지의 영혼까지 갉아먹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라도 해서, 내 영혼까지 바쳐서라도 저주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



<머리>

'그녀'보다는 '그녀'의 몸에서 나온 '머리'에 이입하며 읽었다. 특히 머리가 몸을 갖게 되어 변기에서 나오면서 '그녀'에게 쏟아내는 말을 읽을 땐 퀸Queen의 보헤미안 랩소디의 한 구절, "I sometimes wish I'd never been born at all"이 머릿속에 울리는 것 같았다.

P. 50. "은혜라니, 무슨 은혜란 말이냐? 내가 언제 태어나고 싶어 네게 부탁한 적이라도 있더란 말이냐? 네게서 비롯된 피조물이라 하여 네가 한 번이라도 따뜻이 돌보아준 적이라도 있었더냐? 너는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나를 태어나게 했고 이후에도 나를 혐오하고 역겨워하여 줄곧 없애고자 하지 않았느냐? 내게 베풀어준 것이라고는 있어 봤자 네게는 백해무익할 따름인 배설물과 오물뿐이 아니었느냐? 그나마 받아먹으며 사람다운 외양을 이루기 위해 나는 네게서 갖은 수모와 박해를 받아야 했단 말이다. 하지만 드디어 나는 몸을 이루었다. 어두운 구멍 속에서 이날만을 기다려왔다. 이제 나는 네가 되었으니 너의 자리를 차지하여 살아가리라."

태어난 걸 원한 적 없이 이 세상에 내던져진 막막함과, 나를 제대로 돌보아 주지 않은 '부모'에 대한 원망 (물론 내 부모는 나를 방치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감정들이 절절하게 느껴졌다고 하면 조금 이상할까?

그렇지만 동시에 원한 적 없는 아이를 갖게 되어 지레 겁에 질린 채 내던질 수밖에 없는 어린 엄마의 마음도 느껴졌다.

결론은 어쩐지 임신 중단 합법화를 외치게 된다.



<차가운 손가락>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와중에 서서히 정신이 분열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것 같았다. 과거의 기억들이 온전하지 않고 파편화 되어 제멋대로 끼워맞춰지고 그마저도 사실이 아니라는 의심이 든다면, 제정신을 붙들고 있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몸하다>

<머리>에서 영문도 모르고 이 세상에 던져진 생명에 공감하고 이입을 했다면, <몸하다>에서는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채 생명을 잉태한 여성의 공포에 이입을 했다. 사회 정상성의 압박 - 아빠가 없는 아이는 온전하지 못하다 - 는 것을 이토록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도 없을 것 같다. 내 몸에 있지만 나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그 이질감마저도 마치 내가 겪는 것처럼 생생했다.

마침내 태어난 아이는, 아빠가 없이 태어나게 된 아이는 그 자체로 저주처럼 느껴졌다. 아마 이는 아빠 없는 아이를 낳을 수밖에 없게 된, 그런 선택지 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공포와 절망을 형상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안녕, 내 사랑>

인공지능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상상을 한번 쯤은 하지 않았을까. 모델이 구형이 되어서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하게 되는 것과 동시에, 오히려 너무 뛰어나서 사람을 죽이게 되는 인공지능이 되면 어떨까 하는 것. 그 두 가지 두려움이 한데 어우러져 이런 작품이 탄생했을지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면 '인간적이지 않은' 인공지능에게 집착이라는 인간적이기 그지 없는 감정을 주입했을 때 발생하는 결과, 혹은 집착이 아닌 조금 더 원초적인 '생존본능'이 있는 인공지능은 결정적인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를 상상해낸 결과가 이것일지도.



<덫>

황금 알을 낳는 거위 이야기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종국에는 욕심이 과해 거위를 죽여버리고 땅을 치며 후회하게 되는 인간의 욕심을 질책하는 이야기다. <덫>은 그 이야기의 확장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끝없는 인간의 욕심은 추악하고, 결국에는 그 업보를 돌려받게 된다.



<즐거운 나의 집>

귀신 들린 집에 서서히 잠식되어가는 사람의 심리를 점진적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읽으면서 나도 차라리 집에 붙들려 아무데도 나가지 않고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고 나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면 좀 으스스할까. 특히나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받아 괴롭기만 하면 더더욱 그런 마음에 빠져들기 쉬운 것 같다.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

<덫>과 결을 같이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 사랑과 모험을 곁들여서.

그렇지만 역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험을 떠나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었으나, 그 마음을 배신당해 마녀로 몰렸음에도 다시 사랑을 바라게 되는 강인한 마음에 반하지 않을 도리는 없는 것 같다.



<재회>

P.267. 어떤 사람들에게 삶이란 거대한 충격과 명료한 생존본능이 동시에 찬란하게 떠오른 과거의 어느 시간에 갇힌 채, 유일하게 의미 있었던 그 시간에 했듯이 자신이 살아 있음을 되풀이해 확인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망령이 되어 한 곳을 맴도는 후생(後生)을 짐작해본다. 과거의 영광에 갇혀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앵무새처럼 '나 때는 말이야'하고 떠드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생각해보면, 이들 모두가 결국 그 망령에 지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면 나의 삶은 생동감이 넘친다고 할 수 있을까? 나또한 과거에 잠깐 찬란했던 알량한 영광을 회상하며 살아가진 않나? 그런 것은 살아있다고 할 수 있나?

살아간다는 것을 어떻게 실감할 수 있을지를 고심하게 만들었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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