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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연 Apr 20. 2024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

네이딘 버크 해리스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

네이딘 버크 해리스


30대 중반으로 접어들며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더이상 불우한 어린시절을 탓하며 내게 찾아오는 우울, 불안, 트라우마같은 것들에 잠겨있을 수 없다는 것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나는 그러하다. 늘 흔들리며 헤매던 20대를 보내왔고 내가 있는 자리가 내 자리가 맞는지 항상 좌불안석이었던 시절이 지나갔다. 그리고 무수히도 10대 시절을, 그보다 더 어린 나날들을 원망했고 내가 원하는 사랑을 베풀어주지 못했던 부모를 탓했다. 내 불운의 모든 원인은 부모의 잘못이었다. 애초에 왜 나를 이 세상에 데려와서는.

그런데 이제 나이가 들어서 보니(아직도 누군가는 어리다고 코웃음 칠지도 모르겠지만) 나의 10대는 그저 불행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내가 원하는 방식은 아니었어도 부모는 나에게 최선을 다해 사랑을 쏟아부었고, 또 그럭저럭 견딜만 한 역경과 고난들이 나를 담금질하며 성장시켜 주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 트라우마는 이제 나의 양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제 내 인생에 찾아오는 우울은 누구의 탓도 할 것 없이 오롯이 내 마음의 문제라고 씁쓸하게 웃으며 인정하고 만다.


책을 펼치면서 나의 어린 시절의 불행들이 차근히 스쳐지나갔다. 모든 것들을 넘어서서 나는 여태 살아왔구나. 그런데 불행이 나의 마음을 단련시켜주기만 아니라 나의 건강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거야?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수도 없는데?


네이딘 버크 해리스는 소아과 의사로 가난하고 불우한 어린이들의 삶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자신의 소명이기라도 한듯이, 그리고는 이들의 몸에 나타나는 질병의 징후들이 사실은 그들의 일상에 도사리고 있는 갖가지 위협때문이었다는 것을 찬찬히 밝혀낸다.

이제는 거의 상식처럼 받아들여지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성인이 후에도 정신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에서 발짝 나아가, '정신 건강뿐 아니라 몸의 건강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풀어내는 책은 나의 몸과 마음의 건강 상태를 재점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불행에 내던져진 아이들을 떠올리게 했다.


P. 26 디에고의 경우가 그렇듯 대부분의 환자에게서 ADHD 증상은 난데없이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증상은 어떠 식으로든 삶에 혼란스러운 붕괴가 일어났거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환자들에게서 가장 높은 빈도로 나타났다.


여러 어린이 환자를 예시로 들며, 그들의 삶에 일어난 유독성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사건들이 이 어린이들의 몸과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하는 해리스의 글에는 진심어린 걱정과 마음이 담겨있었다. 읽는 내내 이 어린이들의 회복과 행복을 빌지 않을 수 없었다.

해리스는 단순히 불행과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만을 밝혀낼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아이들의 회복을 도울 수 있을지, 그리고 이것을 어떻게 '시스템'에 녹여낼 수 있을지를 여실히 고민하고 연구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나온 것이 ACE 연구에서 차용한 ACE 지수 검사를 보편 검사로 만드는 것이었다.

ACE 연구는 <아동 학대 및 가정 기능장애와 성인기 주요 사망원인들과의 관계: 부정적 아동기 경험 연구 Relationship of Child-hood Abuse and Household Dysfunction to Many of the Leading Causes of Death in Adults:the Advers Childhood Experience(ACE) Study>로 1998년에 쓰인 논문이다. 처음 발표되었을 땐 여러가지 이유로 동종 업계 사람들의 공격을 받으며 빛을 발하지 못했지만 해리스는 이곳에서 해답을 찾았다.

책의 부록에는 자신의 ACE 지수를 계산하는 질답이 수록되어있는데 이 문답에서 솔직히 0점이 나오는 사람이 존재하기는 할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만큼 아동기에 겪는 부정적인 경험은 의외로 보편적일지도 모르겠다.


아동기에 겪는 트라우마를 빨리 치유하지 않으면 어른이 되어서 더 심각한 질병에 시달릴 수 있다는 이야기에 나는 이미 늦어버린 것일까 하는 걱정이 들지만, 다 자란 어른들도 시간을 들여 마음 챙김을 하면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세지를 전한다.

그러다보니 나의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은 모두 나의 마음챙김을 위한 시간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발견했다. 규칙적인 식사 습관을 들이고, 잠을 잘 자기 위해 노력했으며, 운동을 꾸준히 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정신과를 다니며 약물 치료도 물론 병행했지만 내 스스로를 훈련시키는 나날들에 더 가까웠다.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어도 자기파괴적인 과거의 패턴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도록, 부단한 노력이 뒤따랐다. 책에서 제시하는 '명상'은 아직도 할 줄 모르지만, 그래도 이제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는 걸 매일 느끼는 것이 퍽 신기하다.


P. 343~344. 아동기의 부정적 경험이라는 동전의 양면을 모두 다루어본 경험은 내게 일을 해나갈 에너지를 불어넣어 준다. 나는 어린 시절에 겪은 부정적 경험의 장기적 결과들이 모두 고통만은 아니라는 걸 안다. 어떤 사람들에게 역경은 인내심을 키워주고 깊이 공감할 줄 알게 하며 스스로를 보호하겠다는 결의를 더욱 굳건히 만드는 한편 작은 초능력들을 키워주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모든 사람에게 그것은 몸속에, 또 DNA에 새겨져 우리 존재의 본질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한다. (...) 나는 어린 시절에 부정적 경험을 하며 자란 사람들이 자신의 유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역경을 잊어버리거나 탓하는 것이 쓸모 있는 일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책의 아쉬운 점은 부정적 경험을 하는 어린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나가는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했다는 점이었다. 처음 등장한 환자 '디에고'의 삶에 일어나는 불행을 살펴 보고 디에고가 스스로의 마음을 어떻게 챙기면 될지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지만, 정작 디에고에게 불행을 일으키는 환경, 그러니까 가난, 총기 사고가 빈번한 동네, 그리고 디에고의 삶에 앞으로도 펼쳐질 차별적인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방향성은 제시하고 있지 않았다. 아마도 소아과 의사로서 집중해야 할 부분이 몸과 마음의 질병을 치유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겠지만, '이 지구상의 모든 우물이 이어져있다'고까지 말하면서 정말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명확히 짚어내는 것은 피한다는 것이 미흡하게 느껴졌다.


<어린이라는 세계>라는 책과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이라는 책과 같이 읽으면 좋은 책일 것 같았다. 어린이들의 마음을 쓰다듬는 해리스의 마음과, 일상 속에서 사람들의 삶을 더 나은 삶으로 만들기 위한 해리스의 노력이 이 두 책에서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어떤 부분들과 닮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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