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시청에서 웨딩 드레스를 입고
내 인생에 결혼이란 게 평생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때에도 품고 있던 단 하나의 결혼식 로망이 있었는데, 바로 ‘웨딩 드레스’였다. 거창한 결혼식, 호텔 결혼식, 교회 결혼식, 작은 결혼식, 동사무소 결혼식 등등 이 세상에 존재하는 커플의 수만큼 다양한 결혼식이 존재했지만 그 어떤 것도 내 구미를 당기는 것이 딱히 없었고 (뭐 한때 꿈꿨던 것 중엔 ‘외국을 여행하다가 들린 소박한 성당에서 마을 사람들의 소소한 축하를 받으며 하는 결혼식’이라는 것도 있긴 했으나 그야말로 판타지 중의 판타지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다.) 그래도 어느 순간에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은 짝을 만나 결혼식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면, 식이야 어찌됐든 웨딩 드레스만큼은 ‘내 웨딩 드레스’이기를 바랐다. 그러니까 한국의 공장식 결혼식에서 제공해주는 ‘대여 웨딩 드레스’가 아닌 내가 평생 간직할 수 있는 그런 드레스.
한국에 있을 땐 주변에 이런 로망을 이야기 해봤자 “비쌀 것이다.”, “남들은 다 대여해서 하는데 왜 굳이 구매를 하려 하냐.”, “웨딩 드레스 살 데 없다.” 등등 부정적인 이야기들이 곧바로 이어졌다. 평범하지 않은 선택을 하려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쏟아지는 눈초리.
그렇지만 캐나다에서 결혼식을 하겠다고 정했을 때엔 웨딩 드레스를 ‘구입’하는 선택이 별난 선택이 아니라는 사실에 매우 신이 났다.
북미의 결혼식은 하나부터 열까지 DIY (Do It Yourself)로 진행해야 한다. 한국에서처럼 스드메(스튜디오-드레스-메이크업)과 웨딩홀을 고르는 것이 패키지로 묶여있지 않고 커스터마이징을 하려면 정말 무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 될텐데, 당연한 얘기지만 초호화로 진행한다면 억만금을 주고도 할 수 있고, 단촐하게 한다면 결혼 공증 비용만 있어도 결혼식을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결혼식을 준비하며 나의 첫 선언은 이것이었다. 캐나다에서는 너무도 당연하여 굳이 선언할 필요도 없었음에도.
“웨딩 드레스는 살 거야.”
이렇게 뱉어놓아야만 꼭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에서.
결혼식 장소, 초대할 손님, 피로연장, 꽃 장식, 배경 음악 등등, 나에게는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내가 웨딩 드레스를 입는 것’만이 중요했다.
이 욕망의 근원엔 무엇이 있었을지를 고심해본 적이 있었는데, 그건 아무래도 웨딩 드레스가 갖고 있는 상징적 의미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막연한 추론만 떠올랐다. 결혼식에서 신랑이 입는 연미복이나 정장은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그건 비슷한 복장을 한 하객들에게 둘러싸여있을 모습 때문에 “이 사람이 바로 결혼식의 주인공이오!”하는 외침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웨딩 드레스는, 그 형태가 어떠하든 순백의 새하얀 특성 덕분에 드레스를 입은 사람이 오늘의 주인공이라고 여기저기 소리지르고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그냥 대여를 해서 입어도 주인공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아닐텐데 구태여 ‘내 드레스’를 사고 싶다고 생각한 데에는 대대손손 물려주며 추억을 회상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조금은 있었던 것 같다.
뭐, 그런 존재론적이고 거창한 이유는 사실 뒤늦게 갖다붙인 거나 다름없고, 사실은 어린 시절 보았던 애니메이션 ‘웨딩 피치’에서 웨딩 드레스를 입고 악의 무리와 싸우는 웨딩 전사들의 모습에 경도된 것이 가장 크지 않을까. 그런 것 치고는 그 애니메이션의 내용이 세세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어린 시절의 추억은 원래 다 그런 법이니까. (TMI지만, 당시 내 최애는 릴리였다. 세일러문에서는 세일러 머큐리였는데, 이 정도면 내 취향이 좀 보이려나?)
웨딩 드레스 구입을 마음 먹은 다음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예산 책정이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당시 예비 신랑(!)이 굉장히 융통성이 있었기 때문에 부담을 내려놓고 마음껏 과소비를 할 수도 있었다. 결혼식 전체 예산이 천만 원이라면, 그중 구백 만원을 드레스 구입 비용에 쓰고 예식은 그냥 맥도날드에 가서 해도 좋으니 너의 마음에 쏙 드는 드레스를 고르라는 그런 귀여운 멘트 같은 것에 마음이 괜히 훈훈했다는 뜻이다.
어차피 겨우 드레스 한 벌에 그만한 소비를 할 깜냥은 안 되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선을 정해두고 골라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드레스 값이 얼마나 되는지 몰라서 한 오십만 원 돈이면 괜찮은 거 하나 사지 않겠어? 하고 쉽게 여겼는데, 드레스 쇼핑을 하러 가기 전 인터넷으로 미리 조사를 하니 오십만 원이면 누가 입고 반품한 것 내지는 하자가 있어서 세일 상품으로 나온 것이 아니고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희망을 놓지 않고, 친구 둘에게 부탁하여 유명한 웨딩 드레스 브랜드인 D사의 매장을 직접 찾아가 드레스피팅(입어보기)을 통해 나에게 맞는 스타일을 골라본 다음에 본격 쇼핑에 들어가려고 했다. 분명 매장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오늘은 나한테 어떤 스타일이 어울리는지를 찾기만 할 거야.’하고 생각을 했었는데, 물론 너무 한 눈에 봐도 딱 내 드레스다! 하는 것이 나타나면 바로 결제할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겨두었다.
이 여지를 남겨둔 것이 그대로 실현될 거라는 기대는 정말 없었는데.
드레스피팅에 충실한 조언자이자 조력자가 되어준 두 친구, J와 K뿐 아니라 하필 그 시간에 그 드레스 매장 피팅룸 앞에, 분명 자신의 친구나 가족의 드레스를 골라주러 온 것이겠지만, 어쨌든 그곳에 있던 다른 손님들까지도,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Oh my god, that is the one!”(대박, 바로 그 드레스가 너한테 딱이야!)” 하고 외쳐준 덕분에 단숨에 신용카드를 꺼내들어 결제창구까지 직행했다. 그러니까 드레스 쇼핑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그러나 나에게 완벽한 드레스를 찾아서 결제를 마쳤다고 해서 그게 끝은 아니었다. 다음 단계, ‘Alteration’, 즉 내 몸에 맞추는 수선 작업을 해야 했다.
문제는 이 수선 역시 부르는 게 값이라 대게는 드레스를 구입한 샵이 아닌 동네 수선집에 맡기는 편이었는데, 그런 귀찮음을 감수하면서까지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던 나는 드레스 샵에서 수선까지 다이렉트로 맡겨버렸고, 기어이 드레스 값에 준하는 수선비를 지불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이로써 나의 결혼식 준비는 99% 완료했으니 그 다음은 모두 예비 신랑에게 맡기고 결혼식 전까지 여유로울 수 있었다.
무슨무슨 기념일 이런 걸 기억하는 걸 어려워하는 나와 예비 신랑은 결혼식 날짜를 미리부터 점찍어 뒀었는데, 바로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이자 처음 사귀기로 한 날(두 날은 1년의 시간 차를 가진다)과 같은 날로, 캐나다의 노동절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처음 만난 날은 9월 2일 노동절이었지만 둘 다 왠지 9월 1일로 기억하는 바람에 결혼식도 9월 1일로 정했고 덕분에 기억하기에도 쉽고 기념일 챙기기도 쉽다는 장점이 따라왔다.
예비 신랑분과 나의 또다른 공통점 중 하나는 예식에 큰 뜻을 두지 않는 다는 데도 있었다. 그래서, 9월 1일 금요일에 시청에서 결혼식을 하고, 다음 날인 2일, 식당을 빌려 가족 친구들 불러 모아 소규모 피로연을 하자는 합의에 쉽게 이르렀다. 나로서는 기왕 산 웨딩 드레스를 이틀 동안이나 입을 수 있는 기회였기에 두 배로 신이 났다.
그리고 9월 1일.
나는 토론토 시청 앞에 웨딩 드레스 차림으로 당도했다.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면 믿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관종이 아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내게 관심을 주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냥 눈길도 안 주면 좋겠다.
하지만 이 날은 나의 결혼식 날. 더군다나 그냥 하얀 드레스도 아니고, 완전 빠방한 ‘웨딩 드레스’를 입고 도심 한복판을 성큼성큼 걷는데 시선이 안 몰릴 수가 없었다. 더럽게도 친절한 캐내디언들은 굳이굳이 차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다가도 창문을 내리고 우리를 향해 “결혼 축하해!”하고 인사도 해주었다.
보통 때였다면 부담스럽고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가렸겠지만, 어쩐지 들뜬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그런 낯선 사람들의 관심이 기꺼웠다.
“땡큐! 땡큐!”
그리고 하필이면 시청 광장 앞에서는 중국계의 무슨 행사가 열리고 있었는데, 그런 행사마저도 나의 결혼식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처럼 느껴져서 즐거웠다.
멀리 한국에서 오신 부모님과 남동생 부부, 그리고 내 친구 S와 J, 또 한국만큼 멀지는 않지만 BC주의 산골짜기에서 비행기타고 오신 시아버지 부부, 남편의 누나와 의붓 여동생 커플이 하객으로 참석했고, 우연치않게 배정된 한국계 캐내디언 주례의 진행 속에 나의 3분뚝딱결혼식이 빠르게 끝났다. (엄마가 우리 한국인이라고 한국 사람이 해주는 거냐고 정말 진지하게 물어보셨지만, 우리 캐나다, 그렇게까지 섬세한 나라는 아닙니다.)
미리 예약한 한국인 스냅 사진 작가분이 짧은 결혼식과 예식 후 기념 사진 촬영에 열과 성을 다해준 덕분에 이 날의 예쁘고 설레는 추억이 더욱 진하게 남을 수 있었다.
예식이 끝나고 피로연도 끝나고, 그때 산 웨딩 드레스는 다시 돌아올 기념일을 기다리며 옷걸이에 얌전히 걸려 있다. 이따금 드레스를 꺼내 보며 종종 “아 그리운 옛날이여”하고 추억에 젖기에는 결혼식을 한 게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라서, 지금은 그냥 언제 다시 입을 기회가 올지를 벼를 뿐이다. 부디 다음 번에 다시 꺼내 입었을 때, 나의 체형이 많이 달라져 있지 않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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