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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지 Oct 25. 2017

<유리정원> 왜 인공적일까

*영화 <유리정원> 스포일러가 있어요!


 <채식주의자>의 영혜가 떠올랐다. 영화 말미, 나무는 서로를 상처주지 않으려 하지만 인간은 서로를 죽이려 한다는 재연의 목소리를 듣고 더욱 그랬다. 폭력적인 세상에 맞서 비폭력성의 자연으로 돌아가는 재연은 필연적으로 폭력적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존재를 그 스스로 거스르려 했던 영혜의 모습과 겹쳐졌다. <채식주의자>의 영혜의 행보를 늘 가슴 속에 품고 살아왔기에, 나는 재연의 이야기에도 감명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묘하게 (그녀를 어렴풋이 이해는 하지만) 공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또 한편 나는 재연과 내가 감정적으로 묘하게 어긋나는 적당한 이유를 나는 영화가 끝날 무렵까지 찾지 못했다. 영화가 끝난 후 집에 오는 길에 혼란스러운 마음을 차근 차근 공책에 정리하다보니 어렴풋이 그 이유를 잡아냈다. 이 영화가 나에게는 지나치에 인공적이라는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그 인공적인 느낌이 어디서 오는 걸까. 나는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들은 강하나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모든 것을 인위적으로 짜 놓았다고 생각한다. 인물들은 생기를 갖지 못하고 그저 서사를 끌어가는 용도로만 사용된다. 원하는 서사와 상황을 만들기 위해 가져온 상황들과 인물들의 행동, 반응, 대사들은 모두 어디선가 보거나 들어봤던 것들이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에 집중하다가 인물들에게 생기를 가져다 줄 디테일과 내면의 깊이에는 소홀해진 것일까. 그래서 오직 재연을 보고자 영화관에 달려간 나는 실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초반부부터 차근차근 짚어보자. 재연과 정교수의 사랑 이야기는 특별한 지점을 뽑아낼 수 있을만큼 큰 부분 할애하지 않았을 뿐더러 교수-제자의 사랑은 그 관계에 있어서도 이미 식상한 코드이다.  순수한 자연과 여성, 폭력적인 남성과 도시의 이분법은 영화와 더불어 수많은 소설 속에서도 너무나도 자주 등장했던 식상한 은유가 되지 않았나. 한편 사랑에 배신당해 상처받은 사람의 광기(순수했던 재연의 오염) 또한 신선하지 못하다. 90년대 <위험한 정사>에서부터 최근 <매혹당한 사람들>까지 질투와 배신에 의한 광기를 다룬 영화는 많았다. 재연을 둘러싼 상황과 관계들, 그리고 재연의 광기의 이유와 행동의 동력들은 모두 이미 클리셰에 가깝게 보이고  그렇기에 재연의 내적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흥미로운 인물은 재연의 이야기를 훔쳐 소설을 쓴 지훈이다. 그 또한 세상과 사람들의 폭력에 허우적 대면서 폭력에 상처입은 인물이 스스로 숲으로 들어가 자신의 사랑과 꿈을 광기로 이루려는 모습을 지켜보고 묘사한다. 아마 영화가 흘러가는 내내 지훈의 심리가 관객의 심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지 않을까. 영화 속 지훈이 갖는 입장과 위치가 영화 속 재연보다 흥미로웠지만 지훈이 마지막까지 스스로 그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면서 지훈이라는 인물도 서사의 끝에서 소모적으로 보이는 듯 하다.


이렇듯 감독 스스로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비해 영화는 이미 식상해진 코드들을 가져와 너무나도 인위적인 서사와 캐릭터, 세상을 건설했다. 영화 속 감정들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서사 속에서 관객이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다면 <유리정원>은 영화 속에서 원하는 상황과 감정을 이끌어내고자 손쉽게 서사를 이끌어 간 것이 아닐까. 그럼으로써 관객이 재연에게, 또 지훈에게 공감하도록 하는 길을 차단하도록 만든 것은 아닐까. 재연은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 자연으로 돌아갔지만 크레딧이 올라간 후 나는 인공적인 느낌들을 좀처럼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영화 <유리정원> 포스터



*본 영화는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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