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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지 Apr 18. 2018

#83 <소공녀>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소녀


브런치에 처음 작가가 되어 썼던 글의 제목은 이랬다. '서울에도 작은 것들이 공존할 수 있을까요?' 나는 글에서 거대 자본의 흐름 속, 그 흐름의 일부가 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이 도시에 새로운 변화 가능성을 묻고 싶었다. <소공녀>는 그런 나의 질문과 같은 선상에 있다. 다른 점이라면 영화는 좀 더 개개인의 직접적인 삶 속에서 묻는다. 자본주의의 거대한 물길이 지배하는 이 화려한 도시에서 그 물결의 파편이 되지 않고서도 한 개인의 삶이 공존할 방법이 있을까? 이 도시의 거대 논리에 따르지 않는 그녀를 도시는 살아남게 둘 수 있을까?



ⓒ영화 <소공녀>


 

소공녀(microhabitat)의 삶

소공녀 미소의 삶은 이렇다. 담배, 위스키, 남자친구만이 삶에서 원하는 모든 것이며 그녀가 삶에서 결코 놓을 수 없는 세 가지이다. 집, 직장, 노후자금만큼은 꼭 놓치지 않으려는 이곳 서울의 '보통의 삶'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대다수 후자를 위해 전자를 포기하는 삶을 택하지만, 그녀는 전자를 위해 후자를 포기한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삶에서 나에게 확실한 행복을 주는 것, 내 삶을 조금 더 풍요롭게 하는 것, 이 삶을 기쁘게 가꾸어주는 것일 터. 그녀의 모습은 언제부턴가 이 사회의 논리에 순응하기 위해 이런 것들을 당연하게 포기해 왔던 것은 아닌지 우리 스스로에게 묻게끔 한다.

물론 서울의 많은 이들이 담배와 위스키와 애인을 포기할 만큼 두려워했던 그 운명을 미소도 피해가진 못한다. 그녀는 오르는 담배 값과 집값 사이에서 끝내 집을 포기하고 거처를 잃는다. 그녀는 과거 그녀와 마음을 함께했던 밴드 친구들의 집을 두드리며 머물 곳을 찾아보지만 그 또한 녹록지 않은 일이다. 그녀의 친구들은 저마다 이 땅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했거나 그러기 위한 과정에 있었다. 점심시간에 수액을 맞지만 대기업에서 안정적 직장을 가진 친구(문영)는 잠자리를 이유로 그녀를 거절한다. 그녀를 누구보다 반갑게 맞이하며 함께 과거를 이야기하고 싶은 친구(현정)는 시댁과 남편이 함께 살기에 그녀를 받아줄 처지가 되지 않았다. 여전히 결혼하지 못해 불안정한 친구(록)는 미소에게 결혼해서 함께 안정적인 삶을 택하자고 재촉한다. 부잣집 남자와 결혼하여 부유하게 살고 있는 친구(정미)는 미소의 삶이 ‘염치없다’며 비난한다. 그녀가 이곳저곳 떠도는 것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남자친구는 그녀를 정착시키기 위해 그녀를 떠나버린다.  

소공녀의 삶의 방식은 거대 도시에서 공존하기 어려운 방식이다. 도시는 집도, 정규직도 노후자금도 포기한 그녀에게 살아갈 공간을 남겨두지 않는다. 그것은 인플레이션과 적자생존이라는 자본의 시스템에 따른 판결이기도 하고, 그녀의 친구들이 그랬듯 그 자본의 논리에 따르는 사람들에 의한 판결이기도 하다.  


ⓒ영화 <소공녀>



우리가 그리워 한 미소

한참 미소의 여정을 따라가던 영화는 마지막 신에서 미소의 모습 대신 그녀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친구들의 모습을 다시 소환한다. 저마다 자신들이 선택한 삶을 살아가며 이제 사뭇 그럴듯한 예의라는 이름의 가면을 쓴 이들은 록의 부친상 자리에서 한 자리에 모인다. 은근하게 자신의 삶을 뽐내던 그들이 다시 미소 이야기를 꺼내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여전히 웃는 게 참 예쁘더라


 

미소가 아닌 그들이 영화의 마지막을 마무리하는 것도 예상 밖이었지만 저마다 미소를 그리는 그 말들과 목소리 또한 뜻밖이었다. 그녀를 '염치없다'고 말하거나 그녀에게 '그렇게는 살 수 없다'고 조언하던 그들이지만 또한 그녀를 그리워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아마 그들이 만났던 건 미소라기보다 자기 자신에 가까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미소를 통해 그 시절 우리가 되고 싶었던, 그렇게 살고 싶었지만 끝내 그렇게 되지 못한 자기 자신 마주하고 있던 것일지도. 그들이 미소에게 던졌던 말들은 그런 꿈을 꾸던 자기 자신에게 던지던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마 영화는 끝내 보여주어야 했던 것이다. 미소가 그들을 잠시 스쳐 지나간 것처럼 아주 잠시 그런 삶을 마음속에 품어보았지만, 결코 그렇게 살지 못할 것이란 걸 아는 사람들의 씁쓸한 한 마디를 말이다.


<맨오브라만차>의 돈키호테가 떠올랐다. 모두 돈키호테의 꿈을 비웃지만 결국 그의 꿈과 노래에 매료되어, 그를 그리며 저마다 '이룰 수 없는 꿈'을 부르던 사람들의 모습


영화는 여전히 위스키를 한잔 한 여자와 한강의 작은 텐트를 보여주며 여전히 이 도시에 살아가고 있는 미소를 암시한다. 거대하고 화려한 고층빌딩을 마주 보고 있어 텐트는 더욱 작게만 보인다. 아주 작은, 그러나 환한 빛을 내고 있는 텐트. 나는 그 장면이 두 가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도시에 미소가 살아갈 자리를 좀 더 내어주자는 감독의 따뜻한 제안. 또 이 고층빌딩에 아등바등 환한 불을 더하고 있는 당신이지만, 한편으론 미소의 삶을 그리워하며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을 당신에게 건네는 따뜻한 격려와 위로. 그 어느 쪽으로 읽더라도 나는 이 영화의 결말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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