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브레이스에게는 강간 사건에 대한 자신만의 수사 원칙이 있었다. 경청하고 입증하자.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죠. ‘피해자를 믿어라. 무조건 피해자부터 믿어라.’ 하지만 난 그것이 옳은 관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피해자의 말을 경청하는 것부터 시작해야죠. 그런 다음에 일이 어떻게 흘러가느냐에 따라 확증할지 반박할지 결정하죠.”
- T. 크리스천 밀러·켄 암스트롱,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
“경청하고 입증하자” 이 말은 내가 경찰관들을 대상으로 강의할 때 마지막으로 건네는 메시지이다. 피해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항상 이 이야기를 끝으로 강의를 마무리한다. 피해자의 마음을 헤아리고 보듬어 달라는 의미가 아니다. 피해자가 입을 열어 그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피해자의 말이 가장 유력한 증거이기 때문이다(피해자의 말 하나만으로 가해자를 처벌하는 건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말자).
산업안전대사전에서는 ‘경청’을 ‘상대의 말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전달하고자 하는 말의 내용은 물론이며, 그 내면에 깔려있는 동기(動機)나 정서에 귀를 기울여 듣고 이해된 바를 상대방에게 피드백(feedback)하여 주는 것을 말한다’로 정의하고 있다. 모든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육하원칙에 따라 정확하게 말하는 건 아니다. 앞뒤 정황 다 자르고 피해 장면만 덜렁 말하는 피해자도 있고 정황과 감정에 치우친 말이 앞서는 피해자도 있다. 그럴 땐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해야 할 말이 무엇인지를 짚어주어야 한다.
언젠가 준강간 사건의 피해자 조사에 입회한 적이 있었다. 피해자는 의식을 잃어 피해 사실뿐만 아니라 전후 상황 자체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사건이었다. 사건을 담당한 경찰관이 피해자의 기억을 떠오르게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피해자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 기울이는 모습이 무척 인상 깊었다. 사건의 결과를 떠나 피해자는 경찰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고 했다.
얼마 전, 넷플리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 파트 2가 공개되었다. 학교폭력 가해자에게 복수하는 과정을 담은 드라마인데 파급 효과가 대단하다. 모든 사건이 마무리되고 “그동안 제 얘기 들어주셔서 감사했어요”라는 문동은(송혜교)의 말에 사건을 조사한 경찰관은 “들어야죠. 18년이나 늦었지만”이라는 말을 건넨다. 18년 전 경찰은 문동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때로 돌아가 학교, 경찰 그 누구라도 피해자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면 어땠을까.
사람들은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들어줄 만한 사람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무슨 이야기이든 털어놓는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한다.
친애하는 작가님들과 뭉쳤습니다. 책 속의 문장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