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10년 전 푹 빠져 있던 콘텐츠
오가와 야요이의 만화 ‘너는 펫’
‘약한 모습도, 기가 막힐 만큼 꼴사나운 모습도, 전부 보여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이라 함은, 스마트폰이 등장하기 1년 전이었다. 당시 재수생이던 나를 포함한 많은 학생들은 인강을 듣기 위해 PMP라는 기계를 사용했다. 그러나 마치 핸드폰이 전화 기능보다 게임 기능으로 더 많이 쓰이듯, PMP는 인강을 듣는 것 외에 노래를 듣거나 만화를 보는 기능으로 더 많이 쓰였더랬다. 당시 나는 이 PMP를 통해 내 인생 만화를 접하게 되었으니, 바로 오가와 야요이의 ‘너는 펫’이었다. 10년 전 이 만화를 완독 한 후, 나중에 돈을 벌면 종이책을 전권 소장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기억이 있어 이제야 사려고 찾아보니 절판이란다. 역시 인생은 타이밍인가. 이북이라도 사서 영구소장 해야겠다.
이 만화는 제목과 줄거리만 보면 단순한 순정만화로 느껴질 수 있다. 겉보기엔 차가워 보이는 커리어 우먼이지만 알고 보면 여린 마음을 가진 여주인공 '스미레'는 어느 날 집 앞에 버려진 커다란 박스에서 20대 미소년을 발견하고 가여운 마음에 데리고 와 '모모'라고 이름까지 지어주며 펫으로 키우게 된다. 정말 만화스럽기 그지없다. 게다가 우연히 이루어진 동거라는 설정 자체가 순정만화의 느낌이 다분하다. 그런데 이 만화에서의 동거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러브러브한 동거가 전혀 아니다. 물론 결국 둘 사이에 사랑의 감정이 피어나지만, 오랜 시간 남주와 여주가 함께 지내면서 쌓아가는 감정은 남녀 사이의 감정을 넘어선 그 어떤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모(본명 고다 다케시)는 현대무용을 하는 20대 미소년이다. 갈 곳이 없던 자신을 주워준 30대 엘리트 출신 기자 스미레에게 펫이 되기를 자처한다. 모모는 마치 강아지처럼 스미레가 퇴근하면 애교를 부리며 반겨주고, 그날의 힘들었던 일이나 고민들을 들어주고, 스미레가 만들어주는 밥에 환장한다. 스미레는 북슬북슬한 머리털을 쓰다듬으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 펫에게 밥 주고 씻기고(물론 머리만 감겨준다...) 돌보는 행위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이야기의 초중반까지 스미레는 이 펫에게 그 어떤 이성적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열 살 정도의 나이 차가 있어 스미레에게 모모는 그저 펫, 아이, 소년일 뿐인 데다가, 스미레는 같은 직장 다른 팀에서 일하는 대학 시절 첫사랑이자 완벽한 남자(하스미 선배)와 사귀고 있다. 하스미 선배는 고신장, 고학력을 가진 스미레에게 딱 어울리는 멋진 남자다. 대신 마음속 깊이 좋아한 첫사랑이기에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크다 보니 그 앞에만 서면 불편해지고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 반면 펫인 모모 앞에서는 자신의 찌질하고 못나고 여린 모습까지 모두 보여줄 수 있다. 이야기의 마지막에 결국 스미레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모두 드러낼 수 있는 모모를 사랑하고 또 필요로 하는 자신의 마음을 깨닫게 된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 이 만화에서 중요한 설정은 모모의 성격과 센스, 그리고 직업적 성취였다는 생각이 든다. 모모는 스미레가 힘들 때 간단하지만 따뜻하고 현명한 말들로 보듬어준다. 평소에 대화할 때도 스미레가 편하게 느낄 수 있도록 자신의 펫이라는 스탠스를 이용해 분위기를 유머러스하게 이끌어나간다. 여기까지만 하면 그저 힘들 때 의지가 되고 같이 있으면 즐거운 펫 정도로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모모는 알고 보니 현대무용계에서 촉망받는 유망주였다. 집에서 모모는 펫이기에 스미레가 심부름도 시키고 혼내고 놀렸는데 그 아이가 자기 분야에서 그렇게 뛰어난 사람이라니. 여기서 오는 갭에 스미레는 그만 치여버린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이 만화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봐 오면서 나도 모모 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같이 있으면 편안하고 재미있고 내 모든 모습을 다 보여줄 수 있는데, 또 이면에는 자기 분야에 충실한 멋진 모습이 있어 심쿵당하게 만드는 사람. 나이차, 살아온 배경 차이가 무색할 만큼 대화가 잘 통하고 내 말과 감정을 다 눈치껏 알아주는 사람. 내가 돌봐줘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내가 더 응석 부리고 돌봄 당하게 되는,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정말 필요로 하는 관계.
생각해 보니 연하남이지만 연하남이라는 게 부각되지 않는 이유가, 모모가 스미레를 ‘누나’라고 부르지 않아서인 것 같다. 가끔 장난으로 누님이라고는 하지만, 보통 모모는 스미레를 ‘스미레짱’이라고 부르며 처음부터 반말을 시전 한다. 그래서인지 서로 동등한 관계라는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모모가 평소에는 귀엽고 어딘지 모자란 듯한 구석을 보이지만 자신의 본업인 무용을 할 때만큼은 카리스마 있고 섹시한 모습을 보여준다. 어찌 보면 연하남의 정석 같기도 하지만, 스미레에게 남성성을 어필하거나 남자로서 꼬시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느 흔한 연하남과는 다르다. 그저 스미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껴주는, 여자라기보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사랑하는 듯한 느낌이 순수하면서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모모와 스미레의 신비하고 아름다운 관계뿐만 아니라, 이 만화는 인생의 다양한 면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사랑뿐만 아니라 친구와의 우정, 가족과의 관계, 직장에서의 커리어, 직업을 가진 사람의 사명감, 인간관계에서의 자존심, 타인에 대한 열등감 등 공감할만한 주옥같은 내용이 정말 많다. 그중 기억나는 하나는, 스미레의 절친으로 나오는 '유리'와 인연을 주제로 대화하는 장면이다. 스미레가 유리에게 '우리가 대학 시절에 그렇게 우연히 만나서 친해지지 못했다면 난 과연 어떻게 됐을지 상상이 안 간다'라고 말하는데, 이에 대해 유리는 ‘우리는 그때 그곳이 아니었어도 어디에서든 어떤 식으로든 결국 만나게 되지 않았을까’라고 대답한다. 두 친구의 인연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유리의 이 말에 나도 스미레와 같이 지-잉 감동받았다. 이 아름다운 우정의 장면에 감명받아 당시 절친한 친구들에게 이 감동적인 멘트를 전파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이 만화는 일본에서 2003년에 한 번, 그리고 2017년에 리메이크작으로 한 번 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영화로도 제작된 적이 있는데 예고편만 봤음에도 만화가 주는 진정성 있는 메시지가 퇴색된 것 같아 보지는 않았다. 일드에서는 확실히 만화의 따뜻한 분위기와 메시지를 해치지 않고 잘 묘사했다. 다만 해리포터 시리즈가 영화화되면서 책 보다 너무 적은 내용이 담겨 있어 팬들이 아쉬워하는 것처럼, '너는 펫' 역시 만화에서 워낙 인물들의 다양한 에피소드와 감정들을 철저히 묘사해 놓았기에 인생에 대한 철학적인 메시지와 감정선의 깊이가 드라마에서는 책 보다 부족한 느낌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3년에는 마츠모토 준이, 2017년에는 시손 쥰이 실사화되면 오글거릴 수 있는 모모 역할을 너무 잘 해내줬기 때문에 참 볼 만했다. 내가 일드에 입덕하게 되었던 계기도 이 드라마였으니까.
‘약한 모습도, 기가 막힐 만큼 꼴사나운 모습도, 전부 보여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
이 만화에서 제일 좋아하는 대사이자, 드라마에도 그대로 쓰일 정도로 울림 있게 스토리를 관통하는 한 문장이다. '너는 펫'을 처음 봤던 때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나에게도 이런 존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10년이 지나면 나는 좀 자라 있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만화 속 사랑에 대한 판타지를 꿈꾸고 있다. 만화는 만화라서 가능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가 그런 만화를 즐겨 보는 건 그 이야기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담고 있어서가 아닐까. 다시 한번 '너는 펫'을 정주행 하기로 마음먹고, 내가 바라는 존재가 어쩌면 판타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