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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뮤 Dec 04. 2023

스키장에서 발견한 머피의 법칙

이번 생은 처음이라 생긴 트라우마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스키를 탔던 것은 대략 10년 전이다. 수능이 끝나고 할 일 없이 놀 수 있었던 겨울, 재수학원 친구들이 스키를 좋아한다며 스키장에 놀러 가자고 했다. 나는 어린이들도 타는 스키인데 어려울 게 뭐가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따라나섰지만, 스키가 쉬울 것이란 생각은 나의 착각이었다. 스키를 타면서 나는 수도 없이 눈밭을 굴렀다. 스키를 탔다기보다는 스키를 배우려고 무진장 노력했다고 하는 게 맞겠다. 친구들이 계속 여러 가지 방법을 알려주었지만 내 몸은 뜻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한참을 넘어지다 보니 넘어지는 게 무서워서 높은 시작점에 가기 싫어졌다. 성공을 맛보지 못하고 실패만 하다 보면 희망을 잃는 법이다. 이 날 나는 스키에 대한 희망을 잃었다. 그날 밤 숙소에서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 말고는 스키에 대해 별다른 좋은 기억은 없다. 매번 다른 방식으로 넘어진 기억과 다음날 온몸이 쑤셨던 기억뿐.


왜 무언가를 배우는 데는 대가가 따르는 걸까? 그냥 쉽게 배울 수 있으면 안 되나? 특히 무언가를 처음 배울 때 생긴 안 좋은 기억은 트라우마로 남아서 우리 마음속의 두려움이라는 카테고리에 쏙 들어가 버린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나는 모든 것을 배우는 과정 중에 있었다. 그래서 역무실에 걸려온 간단한 문의 전화 한 통조차 내용을 알아듣지 못하고 사수나 다른 직원에게 넘겨야 하는, 그야말로 백지상태였다. 당연히 사수 옆에 붙어있길 원했고, 사수가 어떤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우면 불안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무슨 일이라도 날까 봐. 


아니나 다를까, 인생은 언제 어디서나 머피의 법칙이 작용할 수 있다. 직원들이 모두 일이 생겨 현장에 나가고 나 혼자 역무실을 지키고 있던 때, 승강장 안전문 닫힘 불량이 발생했다. 승강장 안전문에 문제가 있으면 역 직원의 전호가 있기 전까지는 열차가 출발하지 않는다. 그래서 승강장 안전문 불량을 알리는 비상벨소리가 울리면 역무실에서 직원이 무전기와 경광봉을 들고 바로 뛰쳐나간다. 빨리 가지 않으면 열차 지연이 발생하고, 만약 러시아워 시간이라면 후행 열차까지 지연되면서 민원 발생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이 급박한 상황을 신입인 내가 혼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일단 배운 대로 무전기와 경광봉을 챙겨 승강장으로 뛰어올라갔다. 하지만 무전기 사용법은 배웠는데 기억나질 않고, 전호는 해야겠고, 그런데 승강장에 사람은 왜 이렇게 많은지, 왜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나만 쳐다보고 있는지, 사수도 부역장님도 왜 전화는 안 받으시는지, 모든 게 혼란의 연속이었다. 다행히 구원자인 사수가 곧 도착해서 상황을 해결해 주었다. ‘하필 아무도 없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라며 나를 위로해 주는 사수에게 나는 ‘그러게요 허허’ 하면서 웃어넘기는 척했지만, 이 일은 나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나는 모든 일에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외치는 적극적인 신입이었지만, 이 일이 발생했을 때만큼은 소극적으로 변하는 소심한 모습을 보였다. 승강장 안전문 불량은 그 이후로도 몇 번이나 발생했는데, 그때마다 다른 직원들이 먼저 출동해서 해결했고, 나는 트라우마를 간직한 채 내심 안도하곤 했다. 하지만 나의 이 트라우마를 없앨 성공 경험을 쌓을 기회가 아직까지 없음에 아쉽기도 했다. 이후 나는 사수에게 내 트라우마를 솔직하게 이야기했고, 사수는 다음번 출동 때 나를 데려가서 다시 한번 대처 방법을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그다음번 비상벨소리가 울렸을 때, 나는 드디어 누구보다 빠르게 '제가 가겠습니다!'를 외치며 출동했고,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수도 입사해서 처음 일을 배울 때 트라우마가 생긴 적이 있다고 했다. 부정승차자를 단속하는 업무를 배울 때였다. 무임권은 만 65세 이상, 장애인, 국가유공자 등만 사용할 수 있는데, 가족이나 지인을 통해 무임권을 받아 부정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부정승차 단속이 이루어진다. 또는 카드를 찍지 않고 스피드게이트를 통과하는 사람들도 부정승차자로 단속 대상이다. 부정승차자 단속 업무는 단속 과정에서 발생하는 말다툼이나 폭언으로 인한 스트레스, 그리고 잘못하면 지속적인 악성 민원 발생 소지가 많아서 대부분 꺼려하는 업무 중 하나다. 하지만 부정승차로 인한 수입금 손실을 막기 위해 회사에서는 역별로 부정승차자 단속 금액을 할당하고, 단속 실적이 개인에 대한 평가로 이어지기 때문에 역 직원들은 그 실적을 채워야 한다는 부담감이 상당하다.


사수가 이 부정승차자 단속 업무를 배울 때 처음으로 단속한 승객은 10대 여고생이었다. 아니 여고생이 뭐 얼마나 난리를 쳤을까 싶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트라우마가 생길만했다. 부정승차자로 단속되어 부가금을 내야 한다고 친절하게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학생은 갑자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욕설이 섞인 막말을 하며 난리를 쳤다고 한다. 도저히 상대가 안되어 경찰을 불렀는데, 경찰한테도 온갖 험한 말을 해서 결국에 경찰이 경찰서로 끌고  갔다고 한다. 말 그대로 경찰이 그 여고생을 질질 끌고 갔다고,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한테 걸렸다고 사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 이후로 사수는 트라우마로 인해 부정승차자 단속을 거의 안 했다고 했다. 하지만 트라우마는 극복을 기다리는 존재다. 능력자인 우리 부역장님의 도움을 받아 사수는 나와 함께 부정승차자 단속을 하게 되었고, 다행히 자신의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고 부가금을 납부하는 착한(?) 부정승차자들을 단속하며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었다.


처음 무언가를 시도할 때, 그것을 배우는 과정이 누군가에게는 쉽고 누군가에게는 트라우마가 남을 정도로 어렵다. 이런 차이는 결코 우리 개개인의 잘못은 아니다. 그저 샐리의 법칙과 머피의 법칙이 작용한 것이다. 모든 상황이 나한테 유리하게 작용해서 어려움 없이 성공하거나, 아니면 모든 상황이 나를 힘들게 해서 실패로 이끌거나 둘 중 하나였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우리의 태도이다. 다음번에는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그 트라우마를 고정관념으로 가지게 되니까. 좋은 기억을 가져다줄 다음 기회를 놓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무언가에 실패한 기억이 있다면 앞으로 성공한 기억도 만들어내면 된다. 우리에게는 ‘다음 기회'라는 게 있다. 그래서 나는 올 겨울에 다시 한번 스키에 도전해보려 한다. 이번에는 스키를 배우는 데 성공해서 진짜 재미있게 스키를 타게 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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