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고
어떤 날은 꿈에서 깨었을 때 조금 전 꾼 꿈이 너무도 생생하고 또렷하게 감각(?) 될 때가 있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 그런 날엔 현실 세계 말고 마치 또 다른 세계가 있는 것만 같다. 그러다 또다시 잠에 들면, 현실 세계가 아닌 어딘가에서 또 다른 삶을 산다. 자각몽을 꾸면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인지할 수 있다고 하는 데, 나는 왜 그런 적이 없었는지, 비논리적인 환상의 세계임에도 (깨어보면) 바보처럼 나는 늘 진심이어서 자주 놀라고 어쩔 줄 몰랐다. 새삼 꿈이란 참 신비로운 영역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인간의 무의식과 잠재의식에 관심이 생긴 이유이기도 하다.
평소 종이책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그 두께에 놀라 이북으로 구입해서 자기 전에 휴대폰으로 조금씩 읽었다. 조도를 낮추고, 이불속에서.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뉘앙스는 잠들기 전 깊은 밤과 참 잘 어울렸다. 현실과 꿈, 삶과 죽음,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오고 가는 이야기에 빠져들다 보면 누군가의 내밀한 꿈 속으로 초대된 기분도 들고, 언젠가 들었던 [장자]의 꿈에 대한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했다.
“내가 지난밤 꿈에 나비가 되었다. 날개를 펄럭이며 꽃 사이를 즐겁게 날아다녔는데 너무 기분이 좋아서 내가 나인지도 몰랐다. 그러다 꿈에서 깨어버렸더니 나는 나비가 아니고 내가 아닌가? 그래서 생각하기를 아까 꿈에서 나비가 되었을 때는 내가 나인지도 몰랐는데 꿈에서 깨어보니 분명 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진정한 나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서 내가 된 것인가? 내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내가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_ 장자의 호접몽
무엇보다 이 소설이 내게 준 가장 강렬한 메시지는 '이쪽과 저쪽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다채로운 비유와 상징, 모티브들을 수수께끼처럼 숨겨놓은 환상의 세계. 소설은 ‘많은 것을 전달해 주는 귀중한 마음의 수원’ 같은, 하나의 거대한 꿈이기도 했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닌가? 아니, 애당초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 짓는 벽 같은 것이 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가? 벽은 존재할지도 모른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벽이다. 경우에 따라, 상대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고 형상을 바꿔나간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_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중에서
소녀는 소년에게 소년은 옐로 서브마린 요트 파카를 입은 소년에게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을 열어주었고, 소년의 의식 깊은 곳에 언제나 소녀가 (마치) 살아있었던 것처럼 나와 옐로 서브마린 소년도 하나가 된다.
누군가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소설은 대답 같기도 질문 같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특별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일.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백 퍼센트 사랑하는 일.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계승하는 일. 그렇게 언제까지나 계속될 우리의 공동작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