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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Jun 04. 2024

마실길 5, 6 코스 - 2020.1029

우리가 걸으면서 나눈



이스크림만큼 아이들의 혼을 쏙 빼놓는 것이 없다. 이것도 먹고 싶고 저것도 먹고 싶은 것이 아이들이다. 좋아하는 것 앞에서 하도 정신이 없으니까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어보라고 그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살살 건드리며 나온 것이 두 가지 맛, 세 가지 맛을 그릇 하나에 퍼담아 주는 것 아닐까. 어른들도 짜장면, 짬뽕을 다 먹고 싶으니까 짬짜면을 시키는데 아이들이야 오죽할까. 국민 간식이라는 치킨도 반반이다. 양념 반, 프라이드 반! 하프 앤 하프, 콤보네이션 피자는 거의 대세다. 한 번에 하나로 살아왔던 인류가 한 번에 두 개 이상을 바라는 것은 무리도 아니고 이상할 것도 없다. 하나에서 둘로 곧 둘에서 셋, 넷으로 옮겨갈 것이다. 나도 길을 걸으면서 음악을 듣고 운전을 하면서 통화를 하지 않는가. 심지어 화장실에서 보는 휴대폰은 꿀맛이지 않던가. 아내가 결혼했다는 제목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 한 번에 하나는 따분하고 싱겁고 유치한 관념이 되고 말았다. '멀티 플레이어'가 아니면 짝도 찾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 세계에서 더는 살아남지 못하는 것은 아닐지, 더 빠른 토끼를 잡기 위해 더 빠른 늑대가 나타나고 더 빠른 늑대에게서 살아남으려고 더 더 빠른 토끼가 생존하고 그 살아남은 토끼를 또 잡아먹기 위해 늑대도 더 더 더 빠른 것들이 남는다. 그 유명한 '붉은 여왕효과'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렇게 달려야 우리는 자금 이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고.

두 길을 모두 가볼 수 없어서, 그 유명한 '가지 않은 길'에 나오는 문장이다.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로버트 프루스트의 시를 한 줄씩 다시 써보는 것이. 선술집이었다. 선술집이란 말도 모르던 시절, 대폿집이라고 써 붙인 가게 안에서 오봉 - 이것도 일본 말인 것을 일본에 가서 알았다. 지금은 레트로 감성이 묻어나는 소재가 됐지만 옛날 양은 쟁반, 내 개념으로는 쟁반보다 훨씬 크다. 거기 한 상차림이 가능하다. 밥 파는 식당은 다들 오봉으로 밥과 찬을 날랐다. - 채 놓고 막걸리를 마시다가 불쑥 나왔던 말이다. 겨우 스무 살이었다. 12월 추운 겨울이었고 밖에는 인적도 끊기고 찬바람에 가느다랗게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 박인환, 세월이 가면 첫 문장.

댄디 보이 박인환. 그는 서른에 심장마비로 죽는다. 학교에서 배운 것 말고는 세상의 모든 것이 서툴렀던 내가 처음 외웠던 교과서 밖 문장은 그가 쓴 '목마와 숙녀'였다. 외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목마와 숙녀가 쓰여있던 그 책갈피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책을 살 때마다 그 책갈피를 거기 끼워놓고 살았었는데. 세월이 가면 첫 문장은 그의 묘지를 지키는 비석에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명동에 있던 대폿집 '은성'에 관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멋쟁이들 - 김수영, 오상순, 변영로, 전혜린도 거기 있었다고 한다. -은 대폿집이 어울린다. 거기 구석 한자리를 사정해서 앉았으면 좋겠다. 달리지 않고 가만히 불이나 쬐고 앉았으면 좋겠다. '두 길을 모두 가볼 수 없어서' 내 스무 살은 거기 서 있었다. 거기 서서 멀리 바라보고 있었다.

Two roads diverged in a yellow wood,

And sorry I could not travel both

And be one traveler, long I stood

And looked down one as far as I could

To where it bent in the undergrowth;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한 나그네의 몸으로 두 길을 다 가 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덤불숲으로 굽어든 끝까지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 로버트 프루스트, 가지 않은 길 첫 문장.

그동안 많은 시인들이 새롭게 옮겨 적었지만 아직 처음 외웠던 그대로 기억한다. 첫사랑 같은 문장이다. 그 눈동자 입술 같은 문장이다. 이런 문장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는 것이 내게는 비할 수 없는 기쁨이다. 어떤 길에서 어떤 문장이 내 앞에 나타날지, 한 번에 한 번으로 충분한 꿈을 꾼다. 길 하나에 문장 하나를 만날 수 있다면, 내가 소망하는 것이 꿈이 된다. 길을 걷고 나면 그렇게 꿈에 다녀온다.

​부안 마실길을 걷는 도중에 '서해랑길'이라는 푯말이 군데군데 보인다. 찾아보니 부안 마실길을 포함해서 서해안을 전부 잇는 둘레길이 서해랑길이다. 서해랑길이 하나의 구區라고 한다면 마실길은 동洞이 되는 것이다. 통영에 다녀온 사람들은 동피랑길이 좋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동쪽은 동피랑길, 서쪽은 서해랑길, 그렇게 부르는 것 같다. 우리는 2주 전에 마실길 5, 6 코스를 다녀왔다. 길이 인생을 닮았다는 말을 걸으면 걸을수록 공감한다. 5코스를 걷기 시작하면서 길이 좋지 않다며 투덜댔었는데 6코스에서는 그랬던 나를 반성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르르 저절로 반성이 됐다. 좋은 것만 좋아하는 나, 좋을 때만 좋아하는 나를 그 길 위에서 깨우쳤다. 이런 거 배우자고 걸었던 것은 아닌데 덤으로 얻은 것이 무엇보다도 값지다. 도랑을 청소하다가 가재를 잡은 격이다. 이런 것이 일석이조다. 일석이조는 처음부터 두 마리 새를 잡겠다고 나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열심히 하다 보니까 뜻밖의 결과가 함께 따라온 것이지 처음부터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고 팔 걷어붙이고 나선 것은 아니다. 그러나 더 이상 일석이조는 감흥이 없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두 마리 토끼가 아니라 한 방, 대박을 노린다. 신기하게도 길에는 대박이 없다. 절대 없다. 그래서 길에 사람도 없다. 사람이 떠나간 길을 바람이 쓸고 간다. 이제 길을 걸으려면 바람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 바람이 여기 주인이다. 마실길 주인장은 이상하다, 왜 이리 조용하지 그러지도 않고 허랑하게 허무하게 허송으로 지내느라 바쁘다. 없는 것을 지킨다는 것은 그렇게 어렵다. 괜스레 눈물 난다.

마실길을 걷고 그 길에서 보냈던 시간들을, 매번 바다와 산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을 어떻게 전달하면 좋을지 궁리한다. 언어는 부족하고 사람은 연해서 칡 이파리 한 장도 쓸 수 없다. 저것을 애틋하다고 할까, 그러고도 잘 산다고 할까. 과연 초록이냐 푸르름이냐 진득함이냐. 한 울타리 훌쩍 뻗어나간 칡덩굴을 올려다보면서 겨우 삶이나 떠올리는 내 머리를 짠 바닷물에 폭 담갔다가 천 년쯤 지나서 꺼내면 거기 어떤 칡이 자라고 있겠다. 댄디 보이들이 그리운 생각이 드는 날이었다. 가도 가도 바다, 봐도 봐도 하늘, 온통 파래서 기가 죽었다. 그래도 좋았다. 그래도 가을이었다.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 박인환, 세월이 가면 마지막 문장들.

나는 비로소 고백한다. '서늘한' 한 가슴을 쓸 수 없어서 길을 걷는다고. 이 밝은 낮에 어두운 그림자를 생각하고 나를 지탱해 준 다른 많은 사람들을 떠올린다고. 공간이었던 사람, 시간이었던 그 사람도 보인다고. 무수히 지나쳤던 그 사람이 모두 보이는 하늘, 선생님 같았던 배경이 이제 보인다고.

6코스는 따로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시간이나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먼 거리를 걷지 못하는 날에는 여기를 걸어보라고 나에게 권한다. 밖에 있는 것들은 수고롭게 보이고 안에 있는 것들이 따스하게 다가서는 기분이 드는 곳이다. 참회가 되는 길이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 소리가 났다. 풀어진 신발 끈을 묶어주고 물을 권하고 땀을 닦으라고 수건을 건네주고 싶은 길이다. 그런 것들만 할 줄 알아도 더 나빠지지 않을 것 같아서 안심이 되는 길이다.

우러라 우러라 새여, 자고 니러 우러라 새여.

걸어라 걸어라 너여, 자고 니러 걸어라 너여.

좋은 하루를 살았다는 느낌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시골 버스를 기다린다. 하염없는 시간을 즐긴다. 바보들, 그렇게 걷고도 기다린다. 쌩쌩 지나치는 차들을 구경한다. 우리는 우리끼리 튼튼하게 기다린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버스일까, 무엇일까. 초조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튼튼한 것들은 하늘이나 바람을 건든다. 하늘이나 바람이 건든다. 서로 겨루고 서로 웃는다. 베사메 무초라도 띵가당거리면서 착착착 감기는 여운 같다. 잘 걷고 난 다음은 호젓하다. 마음껏 편안하다. 그런 것들이 사람을 돕는 것 같다. 그런 것으로 사람이 크는 것 같다.

오지 않을 버스를 기다리고 있구나 싶어 지나가던 택시가 방향을 틀었다. 우리는 그럴 줄 다 알았다. 바람하고 지내면 이런 일쯤은 식은 죽 먹기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곰소 소금을 비싸게 받는다고 한마디 하시는 아저씨는 우리가 얼마나 멋진 길을 걷고 왔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곰소에서 고창 쪽으로 다리를 놓거나 땅을 메꾸는 일이 영 허튼 일은 아닐 거라는 이야기도 해주셨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긴 길을 걸어보는 일은 지금뿐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긴 쉰 살이 계속 쉰 살일까. 산이가 언제나 열네 살일 턱이 없다. 열한 살 강이는 금방 스물, 서른 살이 되고 말 것이다.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Somewhere ages and ages hence;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먼 훗날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인생을 이렇게 바꿔놓은 것입니다라고. - 로버트 프로스트, 가지 않은 길 마지막 문장.

6코스 소감을 어떻게 써야 할지 망설이고 미뤘다. 10월이 다 지나가버리면 바닷가 대나무 숲길에 불던 바람이 그 맛을 잃을 것 같았지만 서두르고 싶지도 않았다. 다음 주 11월에는 남은 7코스와 8코스를 다녀올 생각이다. 언제 시작했는지 흐릿해졌다. 흐릿해져야 선명해진다. 허물어져야 쌓아 올리고 죽어야 산다. 떠나고 돌아오고, 길에서 우리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간다.

여기까지 올 것을 생각하고 걸었던 것이 아니듯 삶이란 것은 사람의 생각보다 더 높거나 넓은 흐름 아닐까. 물길을 따라 걷는 기분이다. 보이지 않는 물길이 우리들 삶에는 흐르고 있는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강물처럼, 누군가에게는 시내처럼, 사막에서도 그 물길은 흐르고 있을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강을 건넌다고 그러는 것처럼 존재는 늘 결을 따라 흐른다. 시간도 하나의 결이다. 바탕이 되는 것들은 결이 있다. 결국 그 결 하나 잡고서 내가 가고 있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 박인환, 목마와 숙녀 마지막 문장 바로 앞.

서른에 죽은 멋쟁이에게 술을 따라주고 싶은 쉰 살이다. 그에게도 이 길을 보여주기로 한다. 남은 마지막 코스는 향이 좋은 술을 가지고 걸어야겠다. 그 술은 시詩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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