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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Jun 03. 2024

"아빠"

오래 쓰는 육아일기


"아빠."

강이가 불렀다. 마침 그 이야기를 끝내던 중이었다. 우리가 걸었던 2020년 가을 이야기 한 편이 새롭게 컴퓨터 화면에 뜨고 나는 고개를 뒤로 젖히려던 참이었다. 타이밍은 언제나 중요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이를 바라봤다.

아빠라는 말이 조금 빠르고 급하지만 게발선인장에 피기 시작한 붉은 꽃, 흰 꽃처럼 얌전한 구석도 있다. 붉은 꽃은 펭귄의 자세를 닮았다. 바다표범을 피해 어떻게든 살겠다고 작은 몸뚱어리를 쭉 뻗어서 물속을 쏜살처럼 날아가는 위급함이 거기 있는 듯, 이층으로 된 꽃탑에 불이 켜지는 모습도 거기 있다. 탑들의 정원, 화순 운주사에 다녀왔던 늦가을은 언제였던가. 그 정원을 거닐면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들려줬다. '바빌론 강가에서 요단강을 그리워하며 우리는 울었네.' 부처님께 빌었던 염원들을 하나씩 만져가며 내가 들려줄 수 있는 지금, 그 순간, 베르디를 들릴 듯 말 듯 켜고 있었다. 부처님께 드리는 노래는 가을날 피어나는 연기 같기를 바란다. 너른 들판에서 자그맣게 피우는 연기는 불냄새가 나고 매운 눈물이 나는 그런 연기煙氣가 아니라 대추 한 알을 키우는 햇빛이며 땅, 바람이며 비 그리고 무엇보다 열매가 되는 씨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연기緣起. 만나고 헤어지는 연기들, 인연들이 운주사 골짜기에서 누워있었다. 누워 있고 앉아 있고 서 있는 탑 사이를 부끄럽게 걷다가 말이라는 것이 부질없어 보인다고 나도 거기 서서 탑이 되기를 소원했다. 1분 동안 우두커니 적막이 되었으며 그 사이에 무수한 가을이 떨어지고 흩어지고 날아갔다. 그때에도 강이가 옆에서 불렀다.

"아빠."

저 아이는 내 나이 마흔에 세상에 왔다. 우리 사이에는 40년 세월의 강이 흐른다. 무엇을 보고 배우든 그 세월은 고스란히 남을 것이다. 거기 은결이 돋고 나뭇잎이 떠가고 하늘이 비칠 것이다. 결코 그 강을 건너기 위해 애쓰지 않을 것이고 그럴 것도 없다. 여기에서 바라보는 아이가 가장 보기 좋다는 것을 어떻게 얻었는데, 아끼고 감춰두고 혼자서 웃고 살 것이다. 어린 생각이 걸어간다. 어린 풍경이 지나간다. 어린 세상이 마주 않는다. 어린 사람이 자라고 있다. 나보다 마흔 살 더 재미있고 발랄하고 엉뚱하고 비올라 같고 무지개 같고 희망 같은 세상의 모든 것이 나를 부른다.

강이야, 무엇을 좋아하는 것은 중요하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사람들은 왜 글을 쓰냐고 묻는데 아이는 어떻게 글을 쓰냐고 묻는다. 왜 쓰냐는 말에는 얼굴이 달아오르는데 어떻게 쓰냐는 말은 가슴께에 웃음을 만든다. 둘 다 나를 궁금해하는 것은 맞는데 목적이 다르다. 왜에는 호기심이 보인다. 그 호기심이 싫지는 않지만 컵라면이나 사발면 같은 맛이 난다. 금방 끓고 금방 먹어치우고 금방 버려진다. 어떻게에는 왜도 들어가 있고 어쩌다가도 들어 있어서 생각하게 하고 그만큼 느긋하게 바라볼 기회를 준다. 어떻게, 거기에는 또 묻는 사람이 쓱 안으로 들어온다. '나는 그렇게 못하는데' 그런 말들이 덧붙이는 말처럼 따라온다. 그것은 냄비에 끓여 먹는 삼양라면이나 너구리 같은 맛이 난다. 없는 반찬이라도 냉장고에서 몇 가지 더 꺼내놓고 먹는다. 계란을 풀어서 예쁘게 내놓을 때는 기분도 좋아진다. 먹는 사람이나 끓이는 사람이나.

어떻게 쓰냐는 말에 내게서 꽃이 핀다. 손으로 쓰지, 그랬다가 글쎄, 무엇으로 쓰나 생각했다. 그거 알지 모르겠다. 충실감이란 거. 잘 알지? 계획표대로 하루를 살아가는 거! 그런데 학교 시간표 말야, 일주일 내내 시간표대로 수업하잖아. 빠트리지 않고 잘 지내잖아. 그것도 충실한 거야, 그렇지 않냐고 묻는다. 충실한데 행복했을까, 다시 물었다. 그렇지, 그럴까? 아이가 번복한다. 요리를 레시피에 충실하게 만들었거든, 요리는 입에서 완성되잖아. 입안에서 누군가의 기쁨이 되고 영양이 되었을 때 비로소 요리, 그러지 않냐고 살짝 덤벼들었다. 파스타를 먹고 있는 강이에게 적절한 말이었다. 맵지 않게 추가 주문을 넣고 10분 기다렸다가 먹는 파스타를 강이는 골고루 맛보고 있다. 그러니까 한 번은 충실해야 하는 거 같아. 어제 쓴 이야기를 꺼냈다. 새벽에 글을 쓰고 그 글이 충실했다 싶은 날에는 하루가 자꾸 잘 살아지는 거야. 이게 뭐지? 싶은 게 있다고 말해줬다. 충실하다는 것은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반투명 유리 같은 거 아닐까 싶어. 그것은 거울 같다고 그랬다. 내 자세와 마음 같은 것이 반영되는 거울. 오히려 안에서 밖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창 같은 거 아닌가 싶다고 그랬다. 눈이 내리는지 비가 오는지 바람이 부는지 잘 볼 수 있는 유리창 같은 것이 충실함에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안다고, 스스로 충실할 때 기쁘다고, 기분도 좋아진다고. 그것을 행복이라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그 힘으로 하루를 살고 그러니까 충전을 잘해놓고 아침을 맞이하는 핸드폰이 되는 것과 비슷할 거야. 빵빵한 핸드폰은 통화 걱정이 없잖아. 그게 좋으니까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계속 그러는 것이지. 강이는 버섯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내가 먹어야겠, 말이 끝나기 전에 강이가 자기도 버섯 좋아한다고 먼저 포크를 가져다 댔다. 콕 찍었다.

아빠는 글 쓰는 거 좋아하잖아. 좋아하지.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더 좋아하게 됐다는 거야. 내가 이것을 이만큼 좋아했었구나 깨달으니까 시간이 아까운 거지. 틈만 나면 만지작거리면서 연습하게 되더라니까. 하늘은 뭐라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사람을 돕는다. 테이블에 앉아서 둘이 그러고 있으니까 아내와 산이가 멋쩍게 쳐다봤다. 뭐냐, 머시다냐?

그 충실감이 없었더라면 아마 우울했을 것이다. 깊이 빠져서 허우적댔을 것이다. 나도 사람이니까. 글이 약이라고 하는 말은 믿어도 된다. 내가 먹어봤으니까, 지금도 먹고 있다. 매일 아침 하루에 한 번, 일기도 쓰고 편지도 쓰고 성경도 쓰고 떠오르는 대로 쓴다. 내가 먹는 것은 글이지 결코 약을 먹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들은 모두 약이다. 좋은 약. 좋은 약은 몸에 쓰다고 그러는데 글은 쓰지 않다. 행복해지는 약이다. 저기 마약이네, 그러는 아저씨! 그거 아시나요, 독은 독으로 치료한다고. 나쁜 마약은 좋은 마약으로 치료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가진 마약은 걷기와 쓰기, 두 가지입니다. 생각 있으시면 따라오시든지.

마약의 후유증은 공상이 많아진다는 점이다. 내 공상들, 내 상상들이 게발선인장 꽃처럼 쏙쏙 올라온다. 오늘 열 개는 더 피어날 것 같다.

"아빠"

강이가 부르는 소리를 쳐다봤다. 아빠가 거기 있다. 강이는 나를 보고 나는 강이가 부르는 아빠를 보고 그 아빠는 유리창을 내다본다. 밖은 6월 햇살이 가득하다.

"1일이 다 지났는데요."

"아, 그래····"

하루 늦었으니까 3만 3천3백 원, 3백 원을 더 보냈다.

"고맙습니다."

저 말은 가볍고 경쾌하고 즐겁다는 뜻이다. 돈이 생겨서 좋다는 뜻이고 앞으로는 늦지 말고 착착 잘 보내라는 귀여운 경고다. 고맙습니다. 참 거침없는 경고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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