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비가 내렸고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고작 두 달뿐이었지만 생각하는 법과 그걸 표현하는 방법을 까먹은 탓인지 선뜻 손가락이 움직이질 않았다. 침대에 누워 어떤 글을 쓸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한동안 글을 쓰지 못한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내가 여유롭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경제적으로도 물리적 시간으로도 전보다 훨씬 여유로워졌는데도 내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이는 계속 먹지만 노력이 없어 커리어와 능력은 변한 것 하나 없었다. 그러지 말아야지 늘 다짐하면서도 불현듯 되새겨지는 혈족들의 실망스러운 사건들로 인해 불온해지는 나의 태도도 여전했다. 내 주변을 둘러싼 환경, 관계에 대한 불신, 미래에 대한 불안감, 가학적인 자기 비하와 함께 찾아온 막연한 우울감은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이는 죽음의 두려움과 허무주의로 이어졌다. 고독으로 끝난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모든 가족들에게 내팽개쳐져 공황장애를 앓으며 홀로 지내는 친할머니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이 모든 현실 속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는 나에 대한 자기혐오도 동반됐다.
과거의 나쁜 고질병이 다시 시작됐다. 최소한의 관계만을 유지한 채로 다른 사람과의 연락을 끊고 고립시키는 일을 반복했다. 언제나 타인으로부터 원동력을 얻어 살아왔는데 연료가 떨어지니 고철덩이나 다름없는 꼴이 되었다. 문득 바다가 보고 싶어 여행을 떠나거나 책을 읽는 일도, 글을 쓰는 일도 없어졌다. 게임에 취미를 붙여보려고도 했지만 키보드와 마우스를 움직이는 순간에 무기력함이 찾아왔다. 컴퓨터를 끄면 바로 침대에 누워 유튜브 영상을 보거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시간이 아까워 무언가를 해보려는 시도도 전혀 없이. 굳이 표현하자면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 것에 가까웠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과거의 과거를 되짚을수록 명확한 답이 떠오르질 않았다. 오롯이 환경 때문만도, 나의 문제만도 아닌 좀 더 다각적이고 복합적인 형태로 다가왔다. 처음 현재 내 상태에 대한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땐 악감정과 우울감이라는 잡초와 덩굴로 우거진 '밤의 숲'이 감정과 생각이라는 '양분'에서 자라났다는 관점에서 출발했다. 잡초와 덩굴이 자라지도 못하도록 이쁘고 향기로운 꽃들로 구성된 화분을 만들어 가꿔 나가야 한다는 내용으로 글을 쓰다가 이질감이 들어 다시 생각에 잠겼다.
환경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과 외부 자극들을 과연 내가 마음대로 골라내는 것이 가능한가. 운명과 자유의지를 분간할 수 있는 통찰력이 없는 한계점에서 어디까지를 운명이며 어디까지를 자유의지라고 논할 수 있을 것인가. 환경과 외부 자극들을 '양분'이라고 한다면 그 땅에서 자라난 모든 것은 이롭든 해롭든 간에 마음이라는 '자연'이다. 어떤 것들이 자라는지는 의지로 선택 가능한 게 아니지만 중요한 점은 '그 땅에 자라난 것들 중에서 어떤 것들을 남길 것인가'였다. 마음을 단지 관상용에 지나지 않는 '화분'으로 치부하고 있던 건 아닐까.
부드러운 잔디가 자라면 억센 잡초도 자라고 보기 좋은 꽃이 자라면 괴상한 덩굴도 생기기 마련이다. 다만 꾸준히 솎아 처리해주지 않으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잔디와 꽃이 자랄 공간이 사라지게 된다. 행복한 일들, 기분 좋은 생각들은 주변 잡초와 덩굴만 잘 처리해주면 화려하게 포장하거나 굳이 도드라지게 장식하지 않아도 어련히 알아서 잘 자랄 터인데. 꾸며진 화분 속 퍼담긴 흙에서 자란 꽃은 토지에서 자란 자연의 것보다 유약할 확률이 높다. 잘 자랐다 하더라도 무성히 우거진 잡초들 가운데 그 좁디좁은 곳에 자란 꽃 한 송이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단 한 송이 남은 꽃을 보존하는데 모든 기력을 쏟을 것이고 집착은 점점 심해지다가 이파리가 썩어 시들시들해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 쓰러질 것인데.
강박과 의무감은 잠시 내려두고 다시 조금씩이지만 일정하고 꾸준한 글을 쓰기로 했다. Frank Sinatra의 My way를 틀었다. 그리고 나는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