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주 웃는다. 즐거워서 웃기도 하지만 웃기 때문에 즐거운 이유도 있다. 장난기 많고 가볍게 행동하는 나를 보며 몇몇 사람들은 걱정 없이 사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 말들을 들으면 뭔가 주변 사람들을 마음 편하게 하고 안정시키는 것이 나의 숙명처럼 다가왔다. 너무나도 지치고 힘들어서, 뭔가 생각대로 풀리지 않은 채로 꾹 막혀있는 상황이 오더라도 티를 내지는 않았다. 나는 사람들의 그 말이 너무 좋았다.
'너랑 같이 있으면 마음이 정말 편해.'
주변 친구들부터 학원 선생님, 과외선생님과 좋은 인연의 모든 사람들까지. 누군가의 희망적인 부분이 되고 긍정적인 의지를 전달하면서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 자체로 행복했다. 스스로 꺾여 마음이 제 기능을 못 할 때에도 티를 내지 않았다. 서운해도 서운하지 않은 척, 아쉬워도 아쉬우지 않은 척, 신경이 쓰여도 신경 쓰지 않는 척, 나의 마음은 뒷전인 채로 온전히 상대의 마음에 온 힘을 쏟는 척, 누군가 어떤 연유로 나를 짓밟고 걷어차도 금방이라도 다시 일어나 걸어 나갈 수 있는 것처럼 강인한 척.
나는 알고 있다. 주변 사람들이, 그대들이 바라보는 것보다 매우 나약하고 불쌍한 존재라는 것을. 주체적으로 행복의 원천을 찾지 못해 겉돌다가 타인을 통해 내 존재적 가치를 입증받으려 한다는 것을. 한없이 낮은 자존감 속에서 스스로에게 위안을 받지 못하고 끊임없이 나의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는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것이 내 일상이라는 것을. 내가 나에게, 거울 속의 나에게 '넌 멋져. 잘하고 있어. 넌 할 수 있어'라고 몇백 번을 되새기는 것보다 누군가가 내게 '네가 있어서 고마워'라는 한 마디가 내 존재의 이유를 증명해주었다.
흔히들 사람들이 폭풍 속에서의 갈대와 나무를 비교하여 이야기한다. 큰 바람이 불면 나무는 단숨에 꺾어버리지만 갈대는 유연하게 흔들거리며 꺾이지 않고 버텨낸다고. 하지만 그 갈대가 대단하게 여겨지는 것은 단순히 꺾이지 않은 갈대의 형상을 보며 주변 사람들이 늘어놓는 주절거림에 불과하다. 아무리 강한 바람에도, 아무리 잔잔한 바람에도 갈대는 속이 텅 빈 채로 공허한 껍데기만 유지한 채 간신히 외형을 유지할 뿐이다. 차라리 꺾였으면, 나도 이런 것들에 쉽게 마음이 꺾이는 사람이라는 걸 주변 사람들이, 그대들이 알았다면 이렇게나 어떠한 바람 앞에서도 초연해야 한다는 강박은 없었을 것인데. 안타까운 일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에도 그랬다. 나는 언제나 밝은 아이였고, 걱정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천진난만하고 항상 긍정적인 친구여야 했다. 그리고 나중에 깨달았다. 그 모든 바람들이 얼마나 멍청하고 자신을 갉아먹는 행동인지를. 강인하지 않지만 강인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하다. 여기저기 꺾여서는 분명 아픔을 느끼는 것이 마땅하나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속으로 눌러내며 웃고 지낸다. 몇 시간을 걷고 자전거를 타면서, 나쁜 것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주지 않고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며 생각을 정리한다. 그리고는 집에 들어가기 전에 스스로에 대한 역겨운 생각들, 더러운 마음들과 지긋지긋한 자기혐오적 표현들을 털어낸다. 옅게 남은 것들은 모른 척, 못 본 척 침대 머리맡 귀퉁이에 쓸어내린 채 잠든다.
갈대에게도 바람은 결코 여유로운 것이 아니다. 작고 잘게 꺾여 난 모습은 더더욱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갈대도 꺾인다. 오히려 더 옅은 바람에도 쉽게 꺾이고 얇아진다. 그런 내게 다른 사람들이, 그대가 나의 버팀목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유약한 마음이 끊임없이 몰아친다.
바람이 많이 부는 밤이다. 유독 많이 흔들리는 밤이다. 그리 찬 것은 아니지만 괴로움이 가슴 깊숙이 파고드는, 그런 바람이 부는 밤이다. 그대가 내게 '소중하다' 속삭여주길 간절한 마음이 드는 밤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속이 텅 빈 채로 잠드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