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쓸신잡

읽어봤자 쓸모없는 신변잡기적인 잡문 3

by 김민

군것질에 관한 단상


누이가 보내 준 말린 연근을 씹으며 군것질의 역사를 돌이켜 본다. 구멍가게에서 사 먹던 새우깡을 취향이라고 말하기에는 애매한 것이 애초에 과자 종류가 몇 가지 없었으니까. 중학교 앞 문방구에서 발바닥 모양 빨간 사탕을 팔았는데 그게 내 생에 첫 중독이었다.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신묘한 맛이었다. 다음은 오리온에서 나온 드라키스 쿵이라는 과자였다. 음식에서 어떻게 이런 맛이 나지? 가히 천상의 맛이었다. 고소한 옥수수 맛에 은은하게 배인 치즈향이 일품이었다. 다꼬르 팝콘도 맛있었고 미스터 해머도 좋아했다. 온갖 라면을 부셔 먹었지만 주로 신라면과 안성탕면이었다. 짜파게티를 부셔 요구르트와 함께 먹는 것도 별미였다. 보통 술 좋아하는 사람은 군것질을 좋아하지 않고 담배 피우는 사람은 군것질을 안 한다는데 나는 술도 먹고 담배도 피우고 군것질까지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의 독서 습관 때문이었다. 이불 위에 엎드려 군것질 거리를 쌓아 놓고 책을 읽는 것이 나의 행복이었다. 군것질 거리는 또 다른 세계로 넘어가기 위한 전투 장비였다. 실과 바늘처럼 읽을거리가 있으면 먹을거리도 당연히 있어야 했다. 돈을 벌면서 군것질의 세계는 화려해졌다. 조선소에서 일할 때에는 월급날마다 엄마와 함께 축협에 갔다. 이십 킬로그램짜리 쌀을 한 포대 사고 고기와 반찬거리도 넉넉히 샀다. 군것질거리로 오징어를 한 축씩 샀다. 퇴근길에 책을 빌려 와 오징어를 굽는다. 고추장 1에 마요네즈 3 비율로 소스를 만들어 오징어를 먹으며 책을 보고 있노라면 그보다 더한 기쁨이 없었다. 겨울날 귤을 까먹으며 만화책을 보고 있으면 그곳이 천국이었다. 새콤달콤을 박스째 사는 어른의 기쁨도 만끽했다. 새콤계와 짭짤계가 군것질의 양대 산맥이었다. 비틀즈와 통키통키에서 새콤달콤 포도맛과 딸기맛으로. 아이셔와 신쫄이에서 하리보로. 현재 최애인 포도맛 꼬미볼까지. 새우깡으로 시작해 오징어집과 자갈치, 프링글스를 거쳐 지금은 빠새까지.


군것질과 함께 나이 먹었고 군것질을 멈추지 못하는 어른이 되었다. 군것질에 얽힌 에피소드들도 넘친다. 과자 사 먹을 돈이 없어 당시 택시 운전을 했던 아버지의 가방에 손을 댔었다. 백 개 단위로 세어 놓은 동전을 보면서 이렇게 많으니 몇 개쯤 가져가도 알지 못하실 거라 생각했었다. 결국엔 들켜 죽을 정도로 맞았다. 온몸에 피멍이 들 만큼 맞고 있는데 주인집 아주머니가 뛰어 와 이러다 애들 진짜 죽는다고 말릴 정도였다. 아버지는 도둑놈의 새끼는 키운 적이 없다며 그 추운 겨울에 우리를 발가벗겨 쫓아냈다. 엄마가 빌고 또 빈 후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떠먹는 요구르트를 처음 사 먹은 날 상한 줄 알고 바꿔 달라고 했던 일도 있었고, 반 친구가 먹으라고 책상 위에 비틀즈를 몇 알 떨어뜨려 주었는데 시비를 거는 줄 알고 싸울 뻔했던 일도 있었다. 엄마가 하도 새콤달콤을 사 가니까 축협 직원이 애기가 새콤달콤을 엄청 좋아하나 봐요? 그렇게 묻기도 했었다. 엄마는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그렇다고 했단다. 며칠 뒤 엄마와 함께 축협에 갔더니 애기가 벌써 다 먹었나 봐요 물었는데 쌀 포대를 짊어진 나를 가리키며 그 아기가 쟤예요. 말해서 얼굴이 빨개졌던 기억도 있다. 그래서 한동안 축협에 가지 못했었지. 이등병 시절에는 단군 이래 최대 풍작이라며 제주도에서 군부대에 귤을 보내주었는데 그야말로 산더미 같은 양이었다. 일인당 할당량이 있었지만 병장은 상병에게, 상병은 일병에게. 일병은 막내인 나에게. 평생 먹을 귤을 며칠 동안 다 먹었다. 귤을 너무 많이 먹으면 손톱과 이, 눈까지 노래진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날 이후 이십 년 동안 귤을 먹지 않았다. 한 달에 백만 원씩 편의점에 쏟아붓던 시절도 있었다. 그 무렵에는 허니버터칩이 유행하기 전부터 이건 대박이라며 외치던 과자 소믈리에가 되어 있었다.

새우깡이나 에이스, 오징어볼처럼 꾸준히 사랑받는 과자들도 있지만 드라키스 쿵이나 뽀뽀리처럼 한때 반짝이고 사라진 과자들이 많다. 단종되었다가 돌아온 썬칩이나 와클 같은 과자도 있다. 재출시해달라는 요청이 빗발치겠지만 그때의 그 맛은 아니리라. 그때의 맛을 그대로 구현해도 아니라고 말하지 않을까. 변한 건 자신의 입맛인데도 그때 그 맛이 아니라며 불평하지 않을까. 한 번 맛보고 SNS에 올리고 말겠지. 입맛은 변하기 마련이라지만 고급스러운 맛에 길들여진 혀를 그때로 되돌릴 방법은 없으리라. 나이 든 몸을 그때로 되돌릴 방법 역시 없으리라. 나이 들며 건강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낀다. 운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체감했기에 건강한 음식을 먹으려 애쓴다. 아침에 일어나면 스쾃 200회 후에 바나나, 스텝퍼를 한 다음 삶은 달걀 두 개. 철봉을 당기기 전에는 두부에 간장을 뿌려 먹는다. 출출할 때는 사과나 방울토마토를 주워 먹는다. 콜라에서 제로 콜라로. 제로 콜라에서 플레인 탄산수로. 이제는 탄산수에 콤부차를 넣어 마신다.

하지만 건강한 식단에는 시간과 비용이 든다. 바짝 독기 오른 물가에 과일 하나 사는데도 머뭇거리게 된다. 채소는 또 어찌나 비싼지 살 엄두가 나지 않을 때가 많다. 돈만 있다면 샐러드 배달 서비스를 이용하고 싶지만 어쩌겠는가.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는 법이니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걸로 감사해야지.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갖고 싶은 것 다 가질 수는 없는 일이니까. 마트 마감 시간에 맞춰 과일을 사 오거나 종종 동생이 어머니 편에 들려 보내는 샐러드를 감사하며 먹을 뿐이다. 해가 지기 전까지는 철저히 관리하지만 밤이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어찌 됐든 오늘을 열심히 살아낸 나에게는 상이 필요하다. 술을 마실 수도 없고 만나서 수다를 떨 친구도 없지만 책을 읽으며 과자를 먹는 것으로 충분하다. 혼자 사는 남자의 집이지만 열 종류 이상의 과자가 구비되어 있다. 생생감자칩, 썬칩, 콘치, 오잉, 허니버터칩, 오징어집, 몽쉘, 빠새, 와클... 오늘은 뭘 먹어 볼까나? 이 시간이 너무나 즐거워 콧노래가 나온다. 제철음식을 먹는 것은 더없는 기쁨이지만 언제든 손을 뻗으면 먹을 수 있는 과자가 있다는 것도 커다란 위안이 아니겠는가. 오늘 밤은 루이즈 페니의 소설에 콘치를 곁들이면 어울리겠다. 일과를 마치고 입맛에 맞는 과자를 골라 읽고 싶은 책을 펼치는 것. 하루를 마무리로 이보다 근사한 일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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