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수록 다정한 말을

by 김민

오늘 글쓰기 챌린지 참가자들에게 내어준 글감은 ‘당신이 들었던 가장 잔인했던 한마디’였다. 누구에게 무슨 이유로 그런 말을 들었는지 물었다. 누구에게나 영혼에 박힌 가시 하나쯤은 있는 법이다. 배우자에게 들은 날카로운 말, 부모님이 하신 모진 말, 아이가 던진 날것의 말. 가까운 이들일수록 상처는 깊다. 결코 지울 수 없는 흉터가 된다. 마음을 닫아버리는 계기가 되거나, 관계를 끝내버리는 이유가 된다. 글감을 드리고 나 역시 어떤 말이 가장 아팠는지 떠올려 보는데 생각나는 말이 없다. 참 많은 상처를 받았는데 이상하게도 나이 들수록, 내가 준 상처들만 떠오른다. 한 번 뱉으면 주워 담을 수 없으니 말이란 얼마나 어려운가.

나이 들고도 함부로 말한다면 배변을 가리지 못하는 개와 같다. 사람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내가 하는 언행이 나를 정의한다. 제대로 나이 먹었다면 ‘아끼는 마음에 그랬다.’ ‘사랑해서 그랬다.’ ‘다 잘 되라고 한 소리다.’ 따위의 헛소리로 변명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아낀다면 담배꽁초처럼 툭툭 던지지 않겠지. 사랑한다면 흉터로 남을 표현은 하지 않겠지. 잘 되길 바란다면서 화를 내진 않겠지. 외톨이가 되거나 악몽으로 남고 싶지 않다면 생각 없이 내뱉지 않아야 한다. 혹여 말실수를 했다면 곧바로 사과해야 한다. 침묵할 줄 아는 것이 용기이며, 귀 기울일 줄 아는 것이 지혜임을 늘 되새기며 살아야 한다. 말은 던지는 것이 아니라 건네는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타인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마음의 땅에 무엇이 심겨 있건 상관없다. 쓰레기를 내어 놓으면 파리가 꼬일 것이고, 꽃을 피워 놓으면 벌과 나비가 몰려들 것이다. 못된 말을 하면 나쁜 사람이 꼬일 것이고 다정한 말을 건네면 좋은 인연이 모여들 것이다. 어떤 말을 하는지에 따라 살아갈 세상이 바뀐다.

사소한 한마디가 모여 그가 살아갈 세상이 된다. 작은 말이 모여 커다란 사랑이 된다. 내가 건넨 말로 그들은 나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적어도 다시는 펼쳐보고 싶지 않은 페이지가 되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 가르치려는 말을 버려야지. 말로는 사람을 바꿀 수 없으니까. 어린아이조차 말로 가르칠 수 없지 않던가. 아무리 옳음을 떠들어도 소용없지 않던가. 몸으로 보여주는 것보다 좋은 교육이 있던가. 그러니 평가하려는 말을 버려야지. 세상에 사연 없는 인생이 어디 있던가. 각자의 삶에는 저마다의 진실이 깃들어 있으니까. 비교하는 말을 버리고 정의하는 말을 버리고 다정한 말만 남겨야지.


진심이 아닌 말들은 버려야지. 나이 들고도 타인의 말에 흔들린다면 뿌리를 내리지 못한 나무와 같다. 말은 그저 바람일 뿐이다. 붙들고 있지 않으면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한다. 나에 대해 하는 말은 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무 생각 없이 던지는 말은 피해버리면 그만이고 마음이 담기지 않은 말은 웃어넘기면 그만이다. 소중한 말만 담아두었다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어주어야지. 무엇보다 몸으로 써 내려가는 이야기만이 삶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지. 타인의 말에 흔들리지 않으며 영혼에 스미는 단비 같은 말을 건네는 사람으로 나이 들어야지. 물론 늘 진지할 수만은 없겠지. 때로는 농담도 던지고 실없는 이야기도 해야 사는 게 빡빡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 모든 말들이 다정함에서 비롯해야 한다는 사실만은 한 순간도 잊지 말기로 하자. 그저 사랑의 말을 아끼지 않는 사람으로 살기로 하자.

반찬을 해주어 든든하다고 했더니 “엄마가 있어 든든한 게 아니고?” 이러신다. “엄마가 없으면 못 살지. 우리 정미 씨” 하며 안아드린다. 누이가 샐러드를 보내줄 때마다 귀한 선물 주어 고맙다고 잘 먹겠다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친구 가게로 놀러 가 일을 돕다가 이렇게 올 곳이 있어 기쁘다고 말한다. 진심은 말하지 않아도 안다지만 굳이 아낄 필요가 있을까. 쑥스럽다지만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의 후회보다 더 클까. 없는 걸 짜내는 것도 아니고 있는 걸 건네는 건데 뭐가 어려울까. 그저 익숙하지 않을 뿐이지. 멀어지고 후회하지 않으려면, 떠난 후에 땅을 치지 않으려면, 세상과 이별할 때 가슴을 쥐어뜯지 않으려면 미리미리 해두어야 한다. 사랑의 말을 아껴 두었다 도대체 어디에 쓴단 말인가. 결국 모든 것은 사라진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인연에는 수명이 있다. 그저 사랑의 언어만이 살아있는 동안 생을 데우는 연료가 된다. 진심은 아무리 말해도 닳지 않는다. 진심은 닳아버릴 얕은 마음이 아니다. 마음을 담은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겐 오늘을 견딜 방패가 되고 내일에 닿게 할 징검다리가 된다. 하물며 아끼는 이라면 망설일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다 잘 될 거라는 흔한 말은 하고 싶지 않다. 이보다 잘할 수는 없을 테니까. 또 잘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밥 잘 챙겨 먹고 계절의 바람과 꽃, 잠시라도 누릴 수 있는 여유가 함께 하길 바란다. 답장이 없어도 좋으니 부디 잘 지내주길 바란다. 그것이 나의 기쁨이 될 테니까.’ 차창 밖을 바라보는데 보랏빛 노을이 황홀하다. 노을에 홀려 한 정거장 전에 내렸다. 가까운 이들에게 사진을 보내며 노을이 예뻐 내렸다고 굳이 한마디 덧붙인다. 나이 들며 쓰기 시작한 물결표처럼 말이다. 이러쿵저러쿵 덧붙이는 말에 담긴 마음을 이제야 알겠다. 월요일, 화요일 할 때 요(曜) 자에는 빛나다. 비추다의 뜻이 있다. 우리의 매일이 반짝이고 있다는 말이겠지. 다정한 말로 서로를 비추라는 뜻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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