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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이지상 Apr 22. 2019

오키나와 헤도미사키

오키나와 본섬 최북단의 곶

 헤도미사키(헤도 곶)

     

 헤도미사키는 오키나와 본섬의 최북단이다.

 렌터카를 타고 가면 간단하지만 뜸한 버스를 타고 다녔던 조카와 니는 버스 시간표에 잘 맞춰야 했다.

 우선 나고에서 헨토나로 가는 버스 67번을 탔고 , 거기서 오쿠행 버스를 갈아 타야 했다. 


 (헤도미사키에 대한 버스 정보는 2016년 2월 당시, 막막했는데 그때 오키나와 가이드북 '디스 이즈 오키나와'를 쓰고 있던 지인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지금은 책이 나왔지만 그때는 아직 책이 출간되기 전이었다.)  


 나고 버스터미널에 가니 마침 10시에 헨토나로 가는 67번 버스가 있었다.

 승객은 조카와 나밖애 없었다. 텅 빈 버스는 왼쪽으로 푸른 바다를 끼고 달렸다. 수평선은 저 멀리 하늘에 걸려 있고 가도 가도 바닷가였다. 오키나와에서 가장 가슴이 트이는 바다 풍경이었다. 버스가 바다 밑을 달리는 것 같았다.



 날은 갰지만 바람이 셌다. 가끔 암초들이 나타나면 하얀 파도는 울부짖으며 바위를 때렸다. 풍경이 거칠고 장대했다. 버스가 조그만 마을을 지나자 승객들이 조금씩 탔다. 사이클을 타고 달리는 사람들도 보였다. 억새풀 덮인 들판을 지나 산 밑을 달리다가 어느 마을에 들어서니 헨토나였다. 한 시간이 채 안 걸리는 길이었다.

 버스터미널은 그저 길거리에 있는 작은 공터였다. 차비는 1,050엔. 한국돈으로 1만 원이 넘으니 오키나와 교통비는 비쌌다. 그나저나 헤도미사키 가는 버스는 어디서 타야 하나?

 버스 기사에게 물어보니 거기서 3, 4백 미터 떨어진 또 다른 공터였다. 가던 길을 죽 걷다 왼쪽으로 꺾어지니 미니버스 몇 대가 서 있었다. 옆에 조그만 대합실이 하나 있었다. 11시 30분까지는 40분 정도가 남아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마을은 20분 정도면 대충 다 돌아볼 만큼 작았는데 두어 개 정도 되는 식당은 모두 문을 닫고 있었다. 토요일인데도 2월, 비수기라 그런 것 같았다. 헤도미사키에 가서 먹을까도 생각했지만 거기 식당이 있는지 확신이 안 섰다. 이럴 때는 먼저 식량을 확보하는 게 좋다. 마침 도시락을 파는 가게가 보여서 샀다. 준비를 마치고 11시 25분 정도가 되자 운전기사가 나타나 미니버스에 탔다. 승객은 할머니, 나, 희찬이 셋밖에 없었다.

 (헨토나에서 헤도미사키까지 가는 오쿠행 버스는 하루에 딱 세 번 있었다. 11시 30분, 15시, 18시 10분에 있었다.- 2월 겨울철 시간표 )


 드디어 버스가 출발했다. 이내 창밖으로 푸른 바다가 펼쳐졌고 비가 오기 시작했다. 오키나와 겨울 날씨는 변덕이 심했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고 바다는 몸부림을 쳤다. 차창에 어리는 빗물 밖으로 짙은 구름이 낀 음산한 세상이 펼쳐졌다. 왼쪽으로 높게 솟은 산이 길게 휘어지면서 해변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그 끝이 오키나와 본섬의 최북단 헤도미사키일 것이다. 버스는 거친 비바람을 뚫고 바닷가를 달리다 산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금방 나온 넓은 주차장 앞에 우리를 내려놓고 미니버스는 어디론가 또 달려갔다. 12시 4분, 정확하게 34분 만에 미니버스는 헤도미사키에 도착했다. 헨토나로 돌아가는 버스는 13시 44분이니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1시간 40분.


 온몸을 때리는 바람에 숨이 막힐 정도였다. 오키나와에서 맞아본 바람 중에서 가장 센 바람이었다. 정류장 옆에 비닐을 친 조그만 간이음식점이 있었지만 문을 닫았고 음료수 자판기만 보였다. 바다 쪽으로 넓은 들판이 펼쳐졌고 주차장 건너편에는 화장실도 보였다. 비가 그쳐서 다행이지 우산을 쓰면 다 날아갈 것 같은 바람이었다. 우리는 몸을 움츠린 채 들판을 가로질러 바닷가로 갔고 그곳에는 ‘조국복귀투쟁비(祖國復歸鬪爭碑)’라는 한자가 쓰인 비석이 있었다. 미군정 하에서 일본으로 복귀하자는 운동이 시작되었던 곳이다.




 예전처럼 류큐 왕국으로 독립을 하지 왜 일본으로 복귀하려고 했을까? 오키나와 역사를 보면 이해가 된다. 류큐 왕국은 너무 작은 나라였다. 제주도의 3분 2 영토에 구심점과 힘도 없었으며 이미 전통도 사라진 상태였다.     

 1879년 류큐왕국이 페번치현으로 병합되어 오키나와 현이 되었을 때 류큐 왕국의 지배층은 반발하면서 청나라에게 지원을 요청했었다. 임세공이란 류큐국의 관리는 베이징에서 자결까지 한다. 청나라는 일본에 항의하며 오키나와를 3분할안을 내놓지만 일본은 2분할안을 내놓으며 협상을 한다. 협상은 타결되지 못하고 결국 1895년 청일전쟁이 일어난 후, 청나라는 오키나와에서 손을 떼게 된다.


 이로써 오키나와는 일본화 되면서 류큐의 내셔널리즘은 사라졌다. 일본의 메이지 정부는 신분제 폐지 정책,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 정책을 실시하고 교통 통신 시설, 우편, 라디오 방송 등의 근대 문명을 오키나와에 이식시켰다. 그런 가운데 오키나와의 식자층 사이에서도 오키나와어를 비롯한 일체의 오키나와 전통문화를 제거하고 내면까지도 일본화하자는 운동이 일어난다.


 오키나와인은 근대화 과정에서 이렇게 일본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2차 세계 대전 후, 미군이 점령하자 정체성이 모호하게 된다. 오키나와인들은 미국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니고 독립한 류큐 왕국의 백성도 아니었다. 미군정이 기지건설을 위해 강압적으로 토지를 수용하고 시민의 기본권을 탄압하자 기댈 데 없는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 복귀 운동을 벌인다. 그렇게 되면 일본의 평화헌법 하에서 보호를 받게 되고, 오키나와 내의 미군기지가 철수할 것을 기대했다. 결국 1972년 오키나와는 일본에 반환된다. 


 그 복귀 운동의 시발점이 바로 오키나와 최북단인 헤도미사키였다. 그런 역사를 갖고 있기에 일본인들은 이곳에 오면 감개무량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작 오키나와인들은 여전히 차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일본에 복귀했지만 여전히 미군이 주둔했고 구조적인 차별을 받는 땅이 되었다. 2차 세계 대전 때는 일본 본토와 천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전쟁터가 되었고, 현재는 미국과 일본의 정치적, 군사적 목적을 위한 군사기지로써 오키나와 인들이 희생되고 있다는 인식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렇다고 오키나와는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헤도미사키의 바람은 엄청나게 셌다. 들판 끝은 절벽이었고 그 앞바다에는 뾰족한 바위들이 솟구쳐 있었다. 절벽으로 가니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사람을 날려버릴 것 같았다. 파도가 울부짖고 있는 시퍼런 바다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공포감도 들었다. 높이 솟구치는 하얀 파도는 무서우면서도 장엄했다.



 바람을 좋아하는 나는 이곳이 좋았다. 격렬한 기운이 감도는 이곳은 오키나와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봄, 여름에 오면 푸른 녹색 들판, 뜨거운 공기가 어우러져 지금과 다른 분위기일 것 같았다.

 점심을 비닐이 쳐진 텅 빈 휴게소에서 먹었다.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돼지고기와 야채가 조금 담겨진 도시락을 뚝딱 해치우고 자판기에서 따스한 커피를 뽑아 마시며 버스를 기다렸다. 날씨만 좋다면 절벽에 앉아 풍경을 감상할 텐데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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