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로서 책임을 다하고 있나요
에피소드
#1.
회사에서 화장실을 리뉴얼했다.
신식 제품으로 인테리어를 했는데, 여자직원들은 아주 큰 불편을 겼었다.
화장실 안에 휴지통이 없었기 때문이다.
휴지통이 있으면 냄새나고 위생 상 좋지 않아서 없앴다고 한다.
#2.
회사에서 평판이 좋은 한 직원이 회식 때 아랫사람의 신체를 만졌다. 동의 없이.
인사위원회가 열리고 가벼운 징계로 끝났다.
신체를 만진 직원이 운이 나빴다는 분위기다.
징계를 받은 직원에게 위로주를 사주기 위한 회식을 한다.
#3.
승진심사 때 출산이나 육아휴직을 쓰면 1년 중 12개월을 근무할 수가 없다.
1년에 6개월 일한 직원은 12개월 일한 직원에게 승진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4.
팀 간 친목을 위해 운동회를 한다.
운동회 종목은 축구, 배구, 야구....
대부분의 여직원은 사무실에 있다.
여직원들은 회사일에 소극적이다는 임원의 다그침이 들린다.
#5.
유독 남자들과 잘 어울리는 높은 직급의 여자직원이 있다.
그 여자직원이 술자리에서 남자들이 더 일하기 쉽다는 말을 한다.
#6, 7, 8... 에피소드는 끝도 없이 이어진다.
난 내가 여자인 게 좋다. "하고 싶은 거 다하라"는 부모님 덕분에 자라면서 남녀 차별을 느낀 적이 없다. 운이 좋게도 불미스러운 일도 겪은 적도 없다. 대학생 때는 나한테 잘해주는 남자 동기들이나 선배들이 있어 여자인 게 좋았다. 페미니즘, 남녀평등에 목소리를 높이는 여자들을 볼 때, 힘들게 산다는 생각을, 부끄럽게도, 한 적이 있다.
나이가 들고 회사에서 언제부턴가 주변에 남자들이 많아졌다. 정확히 말하면 여자들이 한 명씩 매년 없어졌다. 이해와 이권 앞에 남자들과 겨뤄야 할 일이 종종 생겼다. 기울어진 운동장인 거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생겨났다.
직장에서 남녀의 애매한 에피소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나는 피했다. 남자들의 적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녀의 흑백논리로 상황을 키워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합리적인 상식으로 상황을 판단하자며 그럴듯한 단어로 상황들을 피해왔다.
난 여자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해 왔다.
여자는 무엇을 해도 눈에 잘 띄고 타깃이 되는 거 같다. 불편하고 억울할 수 있겠지만 사회에서 여자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 공부가 필요한 거 같다.
엄청난 사회적 이슈에 삭발이라도 하고 깃발을 들고 외치겠다는 게 아니다.
회사에서, 일상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뻔한 불평등을 옳지 않다고 인지하고, 다수들이 깨닫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의견을 말할 줄 알아야 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아래에 있는 사람들, 나를 포함한 이들을 위해 신중한 태도와 언행을 해야 한다. 최소한 여자보다 남자가 같이 일하기 편하다는 말을 근거 없이 하지 말자.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믿는 인간의 본성으로 인해, 그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공연한 사실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운동장은 더 기울어진다.
그렇게 사회구성원으로서 여자로서 책임이 있고, 공부가 필요하다. 나를 위해 우리 모두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