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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에서 보이스톡까지 : 닿고자 하는 마음의 역사

속도의 시대, 기다림과 그리움

by 글터지기

캐나다는 지구 반대편에 있습니다.

어제 새벽 05시에 이민 가있는

여동생에게 보이스톡이 옵니다.


우리 집에 보낼 커피 원두를 보낸다는데

주소를 확인하는 전화입니다.


세상 편해져서 이렇게 좋은 소식이

순식간에 닿을 수 있는 시절에 산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기도 합니다.


먼 길을 건넌 소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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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

그 소식이 스페인 왕과 후원자에게

전해지기까지 5개월이 걸렸습니다.


1865년, 링컨 대통령의 암살 소식이

유럽 신문에 실리기까지는 2주일이 걸렸습니다.


그보다 훨씬 이전,

고대에는 누군가를 그리워하거나,

먼 길 떠난 가족에게 안부를 전할 때 선조들은

붓을 들어 한 자 한 자 써내려 갔을 겁니다.


당시 편지는 소식이라기보다

'마음의 다리'였을 겁니다.


보발(步發)과 봉수(烽燧), 그리고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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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지대를 이루고 있는 우리나라는

고대로부터 선조들은 소식을 알리는 데

봉수대를 이용했습니다.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꽃으로

남해안에서 함경도까지 긴급 소식을 전하는 데

12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문자 없는 시대에 놀라운 실시간 통신이었습니다.


특별히 보안이 필요한 소식은

직접 말을 타고 전달했지요.


조선시대에도 지금의 우체국처럼

'보발역'이라는 체계가 있었습니다.


관청에서 파견된 역졸들이 말을 타거나

걸어서 편지를 다음 역으로 넘기는 방식이었지요.

하루 300리(약 120km)를 기준으로 했다지요.


사적인 편지는 보부상이나

장돌뱅이 손에 맡겨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한양에서 전라도 해남까지 서찰 한 통이

도착하는 데 걸린 시간이 보통 보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편지가 오간 그 시간은

그리움과 사랑, 기다림의 시간이었을 겁니다.


전보와 전화 : 선(線)이 생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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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말, 인천과 서울 구간에 전신선이 놓이면서

모스부호를 이용한 '전보'의 시대가 막을 열었습니다.


처음에는 군사나 외교 목적으로 사용했지만

곧 상인과 관리, 신문사들까지 이용하면서

차차 '통신혁명'이 되었습니다.


1885년 당시 26자 기준 전보를

한 통 보내는 가격이 10냥을 넘었으니,

지금 40만 원 정도일 겁니다.

하지만 가족의 병환, 출산, 결혼, 부고 같은

'긴급한 마음'에는 속도가 필요했습니다.


1898년에는 전화기가 들어왔습니다.

목소리가 선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지요.

선조들과 비교하면 기적 같은 편리함이지요.


기다림과 그리움은 어디에 남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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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 생기기 시작한 지 100년이 훨씬 지난 지금은

무선 신호로 주머니 속에서 지구 반대편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하며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 소식을 전하기 시작한 지

불과 수천 년 지났을 뿐인데 속도는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빨라졌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기다림'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봉화의 연기와 보발의 발걸음,

보부상과 장돌뱅이의 짐 속에는

느리지만 편지를 전하는 사람의 간절한 그림움이 담겼고,

소식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하루하루가 설렘이자 기도가 담겼겠지요.


속도가 빨라진 만큼

그리움의 밀도는 옅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파발을 띄우고 장돌뱅이 손에

편지를 전하던 그 떨림이 가끔 그립습니다.


결국, 사람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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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지식채널-e : 내가 너무 빠릅니까

https://jisike.ebs.co.kr/jisike/vodReplayView?siteCd=JE&prodId=352&courseId=BP0PAPB0000000009&stepId=01BP0PAPB0000000009&lectId=6044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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