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숙박에 대하여
지난달, 서울에서 오프라인 모임을 할 때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루를 묵었습니다. 전통 한옥은 아니지만 독립 가옥 한 채에 여러 방을 나누어, 오가는 외국인이나 여행객이 묵어갈 수 있게 만든 숙소였습니다. 꽤 정감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과거 급제를 꿈꾸며 떠났던 한양길이나 파발을 띄우던 관원들은 어디에서 쉬어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료를 찾아보고 책들 들춰 정리했습니다.
삼국시대의 여행은 곧 '사명'의 길이었습니다. 국가 간 외교 사절단이나 군사 이동, 조세 운반 등 나라 일로 길을 나서는 이들에게 숙박은 생존의 문제였을 겁니다.
신라에는 '역(驛)'이라 불린 관영 숙소가 있었습니다. 하루 단위 이동 거리를 계산해서 역마다 말을 두고 관리인을 두었다고 합니다. 오늘날로 치면 고속도로 휴게소 정도가 될까. 백제에도 '원'과 고구려의 '역도'역시 그 연장선에 있었습니다. 이때는 개인의 여행은 꿈도 못 꿀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라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관청 노릇을 한 셈입니다.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시대에는 상거래가 들어서기 시작했고, '원'이 전국 곳곳에 생겨났습니다. 승려와 순례자, 상인들이 이용하는 숙소가 되었지요. 특히, 중국에서 사신이 방문할 때에는 '객관(客館)’이라는 공식 숙소도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신분에 따라 숙소도 구별되었다지요. 사신은 객관, 상인은 원, 백성은 여전히 초가집 마루 한 칸에서 거적을 깔고 비를 피하는 게 고작이었으니까요.
조선은 유교 질서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백성의 생활 문화가 곳곳에서 뿌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주막'이 등장한 겁니다. 술 한 잔과 하룻밤 잠자리를 제공하던 주막은 길손의 쉼터이기도 했지만, 정보를 교환하는 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국가 시책을 알리고 공표하는 브리핑룸이 되기도 했고, 백성들의 여론이 모이는 정보 창구역할, 문서를 나르는 우체국 역할도 했습니다. 조선 후기의 여행기 『열하일기』에도 주막의 풍경이 보이지요.
"밤이 깊자 주모는 구들에 불을 지피고, 길손은 서로의 사연을 풀었다"
주막은 단순한 숙박시설의 기능을 넘어 이야기가 머무는 공간이었습니다. 외국인 여행기에 비친 주막에 대한 기록에는 재미있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첫 주막에 다섯 냥을 맡기고 영수증을 받고, 들리는 주막마다 영수증에 음식과 숙박 비용을 제하고, 마지막 주막에서는 모두 계산하고 남은 거스름돈을 받았다"(V. 시에로셰프스키 '코레야, 1903년 가을)
이를테면 선불 체크카드가 있었던 셈이지요.
19세기말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과 서양문화가 유입되면서 '주막'은 점차 '객주' 또는 '호텔'로 진화했습니다. 상인형 여관으로 변모해 갔습니다.
객주는 물건과 돈을 맡기던 상인이었지만, 숙박과 식사를 함께 제공하던 상업형 여관으로 발전했습니다. 1902년에는 조선 최초의 근대식 호텔, 손탁호텔이 문을 엽니다. 그 무렵 평민들은 여전히 여인숙에 모여 잤지만, 잠자리의 풍경만큼은 이미 근대의 문턱을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21세기,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숙박의 의미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역사 속 숙박 시설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휴식공간이자 정보의 장이었다면, 이제는 거기에 더해 '경험'과 '이야기'가 머무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제주도 게스트하우스, 전주 한옥스테이, 산촌의 민박과 농가체험, 절의 템플스테이까지. 사람들은 자신만의 경험과 이야기를 여행과 휴식에 추가하고 있는 겁니다.
저 역시 지난달 게스트하우스에서의 하룻밤이 오랜 기억으로 남습니다. 단순한 잠자리라기보다 한 시대의 온도와 사람의 숨결이 스미는 '머묾의 이야기'였으니까요.
이 좋은 여행과 휴식, 경험을 저도 한 번쯤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4년 후 제가 현업에서 은퇴하면 이어갈 꿈의 무대이기도 합니다.
그걸 지금 하라고요?
저도 그러고 싶지만 '먹고사는 게 바빠'라는 한계가... 하하하
*참고 자료
- 나무위키 : 주막
https://namu.wiki/w/%EC%A3%BC%EB%A7%89
-역사채널e : 오늘 밤 어디서 묵을까?
https://www.ebs.co.kr/tv/show?prodId=10000&lectId=10444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