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징을 두두리다, 격쟁(擊錚)
요즘 관공서 민원실에 근무하는 공무원 이야기를 들어보면 진상 고객들이 참 많다고 합니다.
"이렇게 성의가 없어?",
"이런 것도 해결 못해?",
"이런 거 국민신문고에 올려서 본때를 보여준다"
정당한 항의라기보다 억지에 가까운 압력과 생떼가 난무한다고도 하지요.
지금 시대에는 '국민의 소리'를 더 가까이 듣겠다고 수많은 창구를 열어 두었습니다. 당연한 일이기도 하면서 제도 자체가 갖는 긍정적 효과가 분명할 겁니다. 하지만 동시에 때로는 제도 자체가 악용되면 본래 취지가 흐려지는 어두운 면을 드러내기도 하지요.
이럴 때면 자연스레 조신시대 신문고와 격쟁을 떠올립니다.
조선 초기에 만든 신문고는 억울한 백성의 사연을 임금에게 직접 알리기 위한 북이었습니다. 중국 송나라 제도를 본받아 백성 누구라도 북을 쳐서 억울함을 고할 수 있게 만든 제도지요.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품은 자는 등문고를 치라" (조선왕조실록, 1401년)
하지만 신문고를 울릴 수 있는 백성은 많지 않았습니다. 신문고를 울리기 위해서는 지방 관리에게 억울함을 고하고, 이도 풀리지 않으면 사헌부에 고한 후, 그래도 억울함이 남으면 북을 울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사소한 일로 지방 관아를 거치지 않고 임금에게 바로 아뢴 죄 등의 명목이 횡행했으니 어지간한 각오가 아니고서야 누가 북을 울렸겠습니까.
억울한 백성이 임금의 행차 길목에 나와 징을 치며 억울함을 호소했던 격쟁. 평소라면 관리들에 막혀 전해지지 않을 목소리가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는 길이었지요. 격쟁은 왕조 체제에서 백성에게 허락된 극히 예외적인 소통 창구였습니다.
하지만 이 격쟁도 관리들의 벽을 뚫고 왕의 귀에 울릴 정도가 되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백성이 억울한 일을 글이나 문서로 고할 때에도 왕의 귀를 어지럽게 했다 하여 곤장을 맞고서야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격쟁을 하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일입니다.
현군이자 성군으로 알려진 22대 정조대왕 시절 '일성록'에는 재위시절 1,300여 회의 격쟁을 들었다고 하니,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국가의 소통은 단순히 말할 기회를 보장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책임 있게 듣고 응답하는 구조가 함께 마련되어야 합니다.
신문고와 격쟁이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실제 기록이고, 왕의 결정에 따라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 줄 수 있었기 때문에 의미가 있었듯이, 오늘날 민주적 소통 창구도 그에 상응하는 권한과 책임이 따라야 합니다.
말하는 사람이 많아진 시대, 더 중요한 건 듣는 사람의 책임이 아닐까.
소통의 문을 여는 것은 단순한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 문을 통해 들어온 백성들의 목소리가 어떻게 다뤄지고 이루어지는가는 오늘날 민주주의가 가야 할 큰 과제이기도 합니다.
말하는 우리도 생떼가 아닌 합리적 의견제시를 먼저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말을 듣는 것도 우리의 가족이자 우리의 구성원이기 때문입니다.
*참고자료
- EBS 역사채널e : 백성의 소리
https://www.ebs.co.kr//tv/show?prodId=10000&lectId=10249757
- 나무위키 : 상언격쟁
https://namu.wiki/w/%EC%83%81%EC%96%B8%EA%B2%A9%EC%9F%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