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색이 나를 깨우네
때로는 미술이 우리의 시각을 바꾼다. 공공미술관의 한국 작가 전시가 자신에게 끼친 영향을 고백한다. 기대하지 않았지만 분명한 흔적을 남긴 전시들이다. 공공미술관은 늘 열려 있다.
2016년의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연애도 했다. 데이트에도 성실했다. 데이트 코스에도 루틴이 있었다. 오늘 영화관을 갔으면 다음에는 미술관에 가는 식. 솔직히 영화관을 선호했는데, 주차가 편해서다. 다른 이유는 없다. 팝콘도 좋아하고, 팝콘 세트의 장난감도 모았지만 하여간 나는 기운이 넘쳤다. 생활도 안정됐고, 농담도 꽤 세련되어졌다. 근데 공허했다.
먹고살 만하면 뱃속에는 고독이 들어찬다. 나는 뭔가 더 대단한 걸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 못했다. 위대한
작품을 쓸 자신이 있는데 첫 문장도 못 썼다. 생각해도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체력이 너무 불타올라 뇌까지
녹아버린 듯했다. 성장기 이후로 이만큼 건강해본 적이 없으니 데이트에 체력을 아낌없이 썼다. 많이 걷고, 많이 웃었다. 우리는 정원을 걸으며 사진이나 찍을 요량으로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 갔다. 전시는 유영국의 <절대와 자유>였다.
미술을 좋아하진 않았다. 난해한 걸 보고 있으면 모르겠다. 내가 왜 이걸 봐야 하는지. 그림 보는 게 무슨 즐거움인지. 그림은 불친절하다. 현대미술이라는 게 대부분 그렇더라.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는 거리를 둔다. 그건 기질이다. 모르는 사람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았다. 아는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정치관을 드러내도 거리를 뒀다. 남의 정치관을 이해하고 싶지 않으니까. 남을 이해해야 해? 아니 꼭 그럴 필요는 없더라. ‘잘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면 되는 걸 굳이 마음을 써? 머리를 굴려? 그러니까 이해하지 않는 편이 덜 소모적이다. 미술관의 그림들이 그렇다. 벽에 걸린 채 조명을 받으며 ‘나를 봐’라고 하지만 봐서 뭐하나. 봐도 모르는 걸.
유영국의 그림에는 원과 삼각형이 많다. 삼각형은 산이고 원은 해다. 꼭 그렇진 않지만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음, 여기 물감으로 그린 산과 해가 있군. 다음 작품. 음, 여기에는 초록색 물감으로 그린 산과 하늘이 있군. 그렇게 빨리 전시장을 통과해 정원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런데 붉은색 그림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작품명 ‘원(円)’ 이라는 그림이다. 타오르는 노을 같았다. 그런데 노을은 바닥이 어두운데, 이거는 붉다. 불꽃인가? 그럼 동그라미는 뭐지? 태양인가? 태양이 너무 붉은데? 그림을 뚫어져라 봤다. 붉은 부분을 오래 봤다. 그때 뭔가를 느꼈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내 안에서 뭔가가 울렸다. 심장은 아니고, 벨도 아니고, 뭔지 모를 무언가다. 그림이 내 멱살을 잡고 끌어들였다. 그때 나는 색에 매료됐다. 내 안에서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 이후로 미술을 대하는 내 태도는 조금 변했다. 유영국의 <절대와 자유>는 절대적인 경험이었고, 감상의 틀을 벗어나 자유롭게 해줬다. 말장난 같지만 달라진 건 사실이다. 그 이후로 미술이 지루하지 않았다. 작품을 진짜 이해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의도는커녕 도슨트 투어도 피한다. 정말 알고 싶지 않다. 정보는 미술을 경험하는 데 방해만 된다. 나는 그저 작품만 본다. 작품이 내게 손짓할 때까지, 나를 잡아당기길 기다리며 응시한다. 작품이 내 기운을 흡수하기를 바라며.
- 아레나 옴므 플러스, 2022년 9월호에 기고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