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케빈 Nov 16. 2022

놀이공원 알바는 당신 아이의 미래를 알고 있다

<20화 - 놀이공원 깨똥철학.01>

인생의 커리어가 아주 희한하게 흘러가고 있다. 얼마 전 커리어를 탄착군에 빗댄 글을 읽었는데 이 상황을 대입해보면 말도 안 되는 모습이 나올 것 같다. 엎드려서 소총만 쏘는 게 아니라 소총도 쐈다가, 수류탄도 던져보고, 단검도 찔러보고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사용해보는 그런 꼴이다.


요식업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건 무엇인지 찾고 그걸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 명확히 함과 동시에 독일 여행 때 빌린 대출을 갚아야 했다. 그렇게 다시 다운받은 알바몬과 알바천국이지만 농촌도시인 곡성 특성상 첫 페이지 하나도 다 못 채울 정도로 선택지가 적었다. 편의점, 식당, 카페 그리고 영화관 정도. 요식업은 무조건 제외하니 놀이공원과 영화관이 남았다. 일주일에 한편 이상의 영화를 볼 정도로 영화에 푹 빠졌기에 내심 영화관 알바를 기대했다. 하지만 면접을 보니 근무시간이 예상보다 더 유동적(이라 쓰고 ‘필요할 때 부르고 안 필요하면 안 부른다’로 읽는다)이었고 그 덕에 임금도 고정돼있지 않았다. 올해가 끝나기 전 벌려놓은 것들을 모두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그래서 남은 유일한 선택지, 주 6일 정시출근-정시퇴근 놀이공원에 전화했다. 1시간 뒤 바로 면접을 봤고 1) 주말에 근무할 수 있는가? 2) 뛰어다닐 수 있는가? 3) 주 5일, 주 6일 중 선택. 이렇게 3가지 질문에 대답한 후 9월부터 출근을 확정했다.


놀이공원에서의 배움을 글로 옮기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것들, 아니 삶에 엄청나게 중요한 요소들을 정말로 많이 배웠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를 곱씹어 보니 놀이공원에서 하는 일 자체가 손님들이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고 제대로 놀이 기루를 타고 있는지 관찰하는 것이다. 생각이 많고 관찰을 즐겨하는 인간에게는 놀이공원도 엄청난 학습의 장이 되었다. 유심한 관찰에 하나의 질문을 더했다. ‘저들은 어떤 인간들이고, 왜 지금 저런 상태이고, 그래서 어떤 세상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가?”


[놀이공원 깨똥철학.01]

지나온 과거, 지금의 현재, 마주할 미래

저 투명한 눈동자가 무엇을 보고 느끼면, 행복하게 자신의 손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부모가 된다는 것.

어쩌다 부모



[지나온 과거, 지금의 현재, 마주할 미래]


에버랜드나, 롯데월드 같은 초대형 놀이공원이 아니라 중-소형 놀이기구 10대를 구비한 작은 놀이공원이다 보니 주 고객층이 5~7세에 포진되어있다. 유아들부터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찾는 곳이다. 내가 평생 본 아이들보다 이곳에서 일한 3달 동안 마주한 아이들이 더 많다. 이 기록은 유치원 교사나 소아과 의사로 갑자기 진로를 틀지 않는 이상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 같다. 이들을 마주한 나의 심정은 흡사 코끼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눈으로 처음 본 조선인들의 충격과 비슷할 것이다. 20대 초반이 바라보는 세상에서, 이들은 존재는 하는데 그 실체는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초, 중, 고를 한국에서 나왔지만 그 집단에 속해서 바라보는 것과 한 발자국 떨어져 그리고 조금은 쓸만해진 사고력을 가지고 관찰하는 건 엄청나게 다른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들을 관찰하면 자연스럽게 나는 저 때 뭐했길래 여기에서 이러고 있지?’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나는 유치원생 때 무엇을 했고, 초등학생 때 어떤 선택을 했고, 중학생 때 무슨 고민을 했고, 고등학교 때 어떤 삶을 살았기에 지금 여기 있는가. 본능적 호기심을 품고 일하다 보니 굉장히 재미난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유치원생들과 부모 그 사이, 딱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5~7세 자녀들로부터 15년을 더하면 현재 내 삶의 시점이 되고 여기서 15년을 더하면 그들 부모 나이가 된다. 게다가 주말에는 대가족 단위로도 많이 와서, 어쩌다 보니 한 공간에서 10개월 아기부터 80세 노인까지 인간의 전 생애주기를 다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이 내 시야 안에서 움직일 때면 마치 이 질문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너는 어떤 삶을 살았고, 그래서 지금 어디 있고,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가?”


[저 투명한 눈동자가 무엇을 보고 느끼면, 행복하게 자신의 손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가?]


놀이공원의 스테디셀러 회전목마를 운전할 때 아기들의 눈빛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건 내게도 없고, 주변 친구들에게도 없고, 세상의 희로애락에 절여진 인간들에게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아주 투명한 눈빛이었다. 회전목마가 돌기 시작하면 초롱초롱하고 똘똘한, 마치 은하계가 들어있는 듯한 그 눈으로 세상 신기한 표정을 짓는다. 마치 그들의 머릿속에서 ‘나는 지금 무엇 위에 올라탄 걸까?’, ‘이건 뭔데 움직이는 걸까?’, ‘내 뒤를 잡아주는 이 사람은 누구일까? 외치는 듯하다. 그리고 나와 눈을 마주치면 ‘저 사람은 뭐지?’라는 표정으로 갸우뚱한다.


내가 그들을 관찰할 때면 그들도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생기가 그득한 깊고 투명한 눈빛을 보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도대체 무엇을 보고 어떤 경험을 하면 이 친구들이 행복하게 자신의 힘으로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찾아왔다.


[부모가 된다는 것]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시선을 옮겨 놀이기구 바깥에서 아이를 쳐다보는 부모들을 관찰해봤다. 대부분 자녀의 찰나의 귀여움을 추억하기 위해 열심히 사진과 영상을 찍는다. (나도 아버지랑 같이 놀이기구 탄 영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속에서 ‘와…’라는 감탄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때껏 보지 못한 인간의 표정이었다. 주식이 따상했다고, 비트코인이 떡상했다고, 어떤 성취를 이루어냈다고 나올 수 있는 표정이 아니었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부모의 시선이란 의지적으로 지을 수 있는 표정이 아니라, 정말 태초의 본능과 같은, 마치 아담과 이브때 부터 이어져올 법한 그런 순수한 미소였다.


2004.07.31


너무 궁금해졌다. '도대체 어떤 느낌이길래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건가? 저런 미소를 지으려면 자녀를 만날 수밖에 없는 건가?' 이전에도 가족을 꾸리고 싶다는 희망은 항상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부모님과 갈등을 겪으면서 ‘아니 이렇게 빡세면 굳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아이들을 바라보는 부모들의 순백한 미소를 보면서 확신 같은 믿음이 생겼다. “누군가의 부모가 되는 건 엄청나게 행복한 일이구나! 능력을 열라게 쌓아야겠다”


[어쩌다 부모]


놀이공원에서 배움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한다. 이 관찰과 사고로 인해 '도대체 무엇을 보고 어떤 경험을 하면 이 친구들이 행복하게 자신의 힘으로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조금이나마 대답할 수 있었다. 아이들을 만날 일이 없으니 어떤 부모들이 있는지도 몰랐다. 놀이공원에서 수많은 부모들을 대하면서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어쩌다 부모’이다. ‘그냥 어쩌다 부모가 된 인간들이 정말 많구나. 부모가 된 사람들 중에서 부모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좋은 부모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무엇이 좋은 양육법인지 한 번이라도 고민하고 생각하고 부모가 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렇다고 부모가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부모가 아주 중요하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런데 여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녀 양육 책을 집어 드는 시기는 이미 너무 늦은 상태라는 점이다. 사실 중요한 것은 이미 오래전에 결정되어버리는 것이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며, 누구와 결혼을 했으며, 어떤 삶을 이끄어가고 있는가 하는 것 말이다. 만일 당신이 머리가 좋고, 근면하고, 교육 수준이 높고, 봉급도 많고, 당신만큼이나 운이 좋은 사람과 결혼했다면, 당신의 아이들도 성공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하지만 당신이 부모로서 ‘무엇을 하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다시 강조하지만,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점이다.

<괴짜 경제학-스티븐 레빗 지음>


놀이기구 표 검사부터 탑승, 운행 그리고 내릴 때까지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 짧은 순간에 한 아이의 미래를 볼 수 있다면 거짓말일까? 표검사를 할 때 아이에게 “직원분이 표 검사 다 할 때까지 기다려요”라고 말하는 부모가 있고, 아이가 자기 멋대로 뛰어다니게 방관하는 부모가 있다. 나이 또는 키 제한으로 탑승이 안된다고 하면 “놀이기구가 높이 올라가는데 아직 키가 작아서 탈 수가 없대. 우리 다른 거 타러 가자”라고 아이에게 친절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부모가 있고, “아 한 번만 태워주세요. 앞에 애는 왜 혼자 타요? 아 정말 깐깐하게구네” 라며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부모가 있다. 아이가 펜스에 올라가려 할 때 적절한 가이드라인을 주고 자신과 타인에게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교육하는 부모가 있고, 펜스 위에 올라가 위험한 행동을 할 때까지도 가만히 보고 있는 부모가 있다. 직원들에게 “감사합니다”라며 인사하는 부모가 있고,  푯값 4,000원 아끼려고 박박 우기는 부모가 있다.  아이가 무서워서 놀이기구 타기 싫다고 하면 “많이 무섭구나. 그러면 다른 거 탈까?”라고 아이의 의사를 존중하고 물어봐주는 부모가 있고,  “그럴 거면 왜 왔어? 어? 너 때문에 여기 온 거 아니야?”라며 윽박지르는 부모가 있다.  놀이기구가 아직 다 멈추지도 않았는데 혼자 안전벨트 풀고 먼저 뛰쳐나가는 부모가 있고, 다 멈추고 아이에게 “'안녕히 계세요'라고 해야지”라며 인사까지 알려주는 부모가 있다.


그런데 아이의 성적뿐 아니라 아이와 관련된 교육과 육아의 많은 부분에 이런 원칙이 적용된다.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하는 것보다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자체가 더 중요하다. 그 이유는 부모의 말이 갖는 무게와 아이의 자발성이 깊게 엮여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무엇이든 자발적으로 자기 주도성을 갖고 사물을 대하는 것과 수동적으로 대하는 것은 큰 차이가 난다. 알아주는 학원의 최고 수준의 선생님이 가르친다고 해도 억지로 가서 공부하는 학생과 남다른 의지로 혼자 새벽에 일어나 공부하는 학생의 학습효율에는 엄청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부모의 교육 수준이 높으면 아이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부모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높을수록 아이는 공부를 잘하는 것이 높은 사회 경제적 지위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습득한다. 하지만 부모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낮다면 아이는 공부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부모를 신뢰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부모 자신도 그러지 못한 것을 왜 자기에게 강요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해 스스로에 대한 내적인 자극을 포기할 수도 있다. 그래서 부모 자신이 하지 못한 것을 자식에게 하도록 설득하는 데는 엄청난 노고와 에너지가 들기 일쑤다. 공부 문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인생에서 자신이 얻은 깨달음이나 어렵게 얻은 교훈을 전달하고 나누는 과정 또한 마찬가지다. 만약 그 깨달음을 현실에서 제대로 구현하지 않고 있다면, 자식이 그것을 마음 깊이 받아들여 내적인 동기로 삼을 가능성은 아주 낮다. 이미 늦었다고 생각되지만 도저히 포기할 수 없을 만큼 아이를 사랑한다면 남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노력의 이면에는 자기 자신을 바꾸려는 노력도 수반되어야 한다. 부모 노릇 참 어렵다.

<거의 모든 것의 경제학- 김동조 지음>


가만히 관찰하고 있으면 진심으로 저 아이의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았다. ‘정말 품위 있는 좋은 부모님을 만났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도, ‘도대체 누가 누구를 키우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나도 궁금했다. '어떻게 하면 자녀를 잘 양육할 수 있는가?' 놀이공원에서 든 순진한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 삶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었다. 이걸 알게 되면 지금껏 내가 커 온 방식에서 무엇이 충분했고, 어떤 것이 부족했는지 그리고 이것에서 더 나아가 (나중에 한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느꼈던 행복은 더 충만하게 전해주고, 내가 겪었던 고통은 덜어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경제학자,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그리고 소아정신과 의사까지 수많은 이들의 지혜를 빌렸고 이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뜻밖의 사실이 있었다. 바로 당신이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당신이 누구인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들 모두 아이의 성적뿐 아니라 육아의 많은 부분에서 부모 그 자체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바로 자발성이 가지는 힘 때문이다. 일상에 스며든 언어에서도 이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아이들이 ‘보고 배운다’고 하지 '가르치는 걸 배운다’고 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배우는 건 부모 그 자체. 부모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 어떻게 타인과 약자를 대하는지, 어떤 자세로 삶에 임하는지를 보고 배우는 거지 부모가 읽어주는 영어책, 부모가 데려가는 학원에서 보고 배우는 것이 아니다.


부모의 근본적 역할 중 하나는 아이들에게 삶을 살아가는 데 등대 같은 기준이 되어줄 가치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전에 부모 자신의 가치부터 바로 세워야 한다. 내 아이에게 가르치고 싶은 가치를 부모가 먼저 가지고 추구해야 한다. 부모의 삶에서 묻어나는 중요한 가치는 아이에게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책임감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해. 그리고 신뢰성이 중요하지. 우리 아이는 맡은 일을 잘 해내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라고 생각한다면 부모 자신이 먼저 책임감과 신뢰를 우선순위에 두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도 추구해야 한다. 자신은 그 가치를 무시하는 언행을 보이면서 아이를 가르치는 것은 모순일뿐더러, 가르침이 잘 전달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본질 육아-지나영 지음(소아정신과 전문의)>


부모라는 것도 결국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정체성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이 정체성을 택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저 이기적 유전자에 박힌 본능 때문일까?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날을 기다리며.




매거진의 이전글 공부가 싫어서 특성화고를 가려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