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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그리엄마 Feb 07. 2020

엄마 과학자 생존기 - 19

엄마와 아들의 동상이몽

 19. 엄마와 아들의 동상이몽



그렇게 퇴직 (이라 쓰지만 회사를 없애버림) 이 결정되었다.

퇴직 후 무엇을 할지를 고민하게 되는 2번째 시즌이 도래한 것이다.

이번엔 지난번과 달리 나름 할 일이 많았다.

막연한 나의 생각을 현실에 옮기기 위한 작업도 해야 했고,

이 현실이 결국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에 대한 수익구조도 생각해봐야 했고

밀린 글도 써야 했고,

나름 공부해보고 싶은 것들도 있었고 (사업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아이가 아직 엄마를 필요로 할 때 아이와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다.


음.... 그래 아이와 놀고 싶었다.

구구절절 다양한 이유를 갖다 붙였으나 사실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였다.

나는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었다.


아침마다 늦었다를 외치며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엄마를 비웃듯 이불에서 뒹굴거리고

매일매일 놀고 싶다는 주제가 명확한 자작곡을 불러대며, (주 가사 : 하루 종일 즐거워~의 무한반복)

돌봄반 대신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하원을 하는 게 소원이라는 아이와 함께 되도록 많은 시간을 보내보고 싶었다.


이번에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것은 이전과 달리 어렵지 않았다.

이전과는 달리 등 떠밀려 내린 결정이 아니었고,

지난 2년 반의 경험으로 반드시 현장에 남아 초자를 잡아야지만 과학자로서의 나의 정체성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간이 없었다.

아이의 시간은 절대 나를 기다려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아이가 나를 찾을 때가 내가 아이 옆에 혹은 뒤에 있어줄 적기인 것이다.


굳이 정리하자면 그랬다.

나는 아이에게 나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대신, 아이를 기다리며 정면으로 아이를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아이의 뒷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것만 가능하다면, 나의 이번 1년은 후회 없는 시간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아이와 가고 싶은 곳이 많았다.

아직까지 한 번도 못 가봤던 놀이동산도 가고 싶었고,

아이가 태어난 이래 한 번밖에 가지 못한 동물원도 가고 싶었다.

어린 시절 내가 누린 것처럼 다양한 곳에 다녀보고 싶었다.

사극 덕후인 아들과 함께 민속촌도 가고 싶었고, 계절마다 아름답게 변하는 고궁도 함께 거닐고 싶었다.

어린 시절 내가 겪었던 것처럼 아이에게 소소한 아름다운 기억을 남겨주고 싶었다.




이러한 원대한 꿈을 갖고, 아이에게 나의 퇴직을 알렸다.

예상대로 아이는 매우 격하게 이를 환영하였다.


"엄마 회사 안 가? 그럼 나 일찍 집에 가?"


어쩌면 지극히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한마디가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일찍 하원... 아니 일반적인 교육과정이 종료되는 시간에 하원을 해본 적 없는 아이의 말에 속이 상했다.

다른 아이들에게 평범한 일상이 우리 땡그리에게는 복권에 당첨된 것 같은 일이란 사실이 씁쓸했다.

속상함을 뒤로하고, 우선 아이에게 엄마와 평소에 하고 싶었던 것들이 있는지를 물었다.

이제 엄마가 집에서 일을 할 예정이라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할 수 있다는 설명을 해주자 아이의 눈빛이 달라졌다.

정말 그대로 되냐며 눈을 반짝거리는 아이를 보며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그럼 나 태권도 갈래~XXX 태권도 보내줘. 우리 반 A도 다니고 B도 다니고 C도 다니고 D도 다녀. 나도 갈래~"


응????

뭐?????

엄마와 놀러 가겠다고 할 줄 알았던 에미의 기대와 달리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기... 아들, 엄마랑 놀고 싶은 거 없어? 뭐 해보고 싶거나 그런 거는 없어?"

"응 태권도 배울 거야"


........... 엄마 일 때려치워서 당분간 돈 줄었는데.....

왜 너는 이 시기에 태권도를.........(돈 쓰는 재주가 남다른 아들...)

얘가 왜 이러나 싶었다.

아이와 며칠 동안 태권도 가는 문제에 관하여 계속 질문을 던진 끝에 대략 아이의 생각을 조합할 수 있었는데, 그 생각이 이러했다.


엄마가 회사에 안 간다

일찍 끝난다

돌봄 교실에 남지 않는다

친구들과 함께 놀 수 있다

친구들은 모두 태권도에 다닌다.

따라서 친구들이 있는 태권도를 가면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


아이의 제안은 나름 타당한 논리를 구성하고 있었다. 반박할 수 없었다.

아이는 돌봄 교실에 홀로 남아 엄마를 기다리는 것을 싫어했다.


사실 우리 아이는 천운으로 돌봄 교실이 존재하는 단설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다.

유치원 돌봄반에 있음으로 인하여 아이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 곳에서 이동하지 않고 지낼 수 있다.

통합반으로 운영되는 돌봄반에 있음으로 인하여 외동인 아이는 동생을 케어하는 방법,

형 또는 누나와의 놀이를 습득할 수 있고,

형, 누나들에게 많은 삶의 지식 (종이접기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이 어디에 있겠는가....

심지어 등 하원을 모두 엄마가 할 수 있으니 좀 귀찮기는 하지만

유치원에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아이의 안전이 완벽하게 확보 가능한 최고의 환경이었다.


그런데 이 완벽함은 오로지 부모인 우리를 위함이었던 모양이다.

아이는 돌봄 교실에 있는 것이 매우 불만이라고 했다.

이유인즉슨 돌봄반에서 같이 놀던 친구들이 5-6시에는 각자 학원에 가기 때문이라 했다.

친구들이 계속 줄어들어서 제대로 놀 수 없다는 것이 아이의 항변이었다.

따라서 친구들과의 놀이를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친구들이 가장 많이 다니고 있는 XX태권도에서 수련을 하면, 괜찮을 것 같다는 것이 아이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사실 나와 남편은 아이를 학원에 보내고 싶지 않았다.

좀 더 정확히, 또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이 부모의 퇴근 시간보다 빨리 종료되는 관계로 발생되는

돌봄을 위한 학원 투어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다.


대게 많은 유치원과 어린이집이 대략 4-5시에 끝나는 경우가 많다.

아이가 로또급의 대운을 타고났다면 필자의 경우처럼 돌봄 교실이 존재해서 7시까지 케어가 가능하겠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면 아이는 부모의 퇴근 시간 전까지 학원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학원에서 부모를 기다려야 한다.

더 운이 좋은 아이라면 야간보육이나 저녁 보육이 가능한 어린이집에 다닐 수 있겠지만 지역마다 이런 어린이집은 극히 드물며 그 어린이집이 만 5세와 6세를 돌볼 수 있는 곳인지 아닌지는 복불복이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결국 부모는 돌봄 공백을 메꾸기 위해 여러 가지 학원을 선택하게 된다.

아이 능력의 성장을 도모하는 것이 아닌 단순히 아이를 케어하기 위한 부모들의 고육지책이다.

정부에서 각종 수당을 만들어내며 겉만 번지르르한 돌봄 정책을 이야기하는 동안

현실에서 부모들과 아이들은 돌봄 공백을 막기 위해 사교육을 선택하는 아이러니를 경험하게 된다.


이런 경우도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지는 6-7세나 가능하다.

그보다 어린아이는 학원에서 받아줘야 보낼 수 있기 때문에 그게 불가능한 경우, 부모들은 하원 도우미를 고용해야 한다.

이런 파트타임 이모님을 정기적으로 고용하다는 것은 가계에 엄청난 부담이 된다.

돈도 돈이지만 돈보다 더 큰 문제는 아이를 함께 키울 양육 동반자로서 베이스를 갖춘 좋은 선생님을 만난다는 것이 복불복이라는 현실이다.

정부의 아이 돌봄 서비스건 사설업체를 통한 고용이건 부모들은 돌봄 선생님을 일단 믿고 아이를 맡겨야 한다.

몇 번의 만남을 통해 그나마 괜찮다고 생각되는 이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긴급 돌봄인 경우, 그날 만난 선생님께 아이를 맡기고 나와야 하는 웃픈 일도 벌어진다.


아이를 최선을 다해 케어해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고 맡기지만,

사실 이 분들의 지난 이력이나 관련 교육에 대한 정보를 부모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가뜩이나 마음이 불안한데,

간혹 뉴스를 통해 우리는 어처구니없는 아동학대 이야기를 접하게 되고, 혹시 나는 괜찮은지 걱정해야 하는 현실이다.

그나마 믿고 맡기는 것이 정부지원 아이 돌봄 선생님인데, 여기서도 이슈가 발생해버리면 어쩔 수 없이 사설업체를 통해 돌봄을 제공받아야 하는 이들은 얼마나 마음이 불편하겠는가?


이러한 이유로 결국 부모들은 차선책으로 학원을 선택한다.

그나마 학원은 내 아이 외에도 다른 아이들이 존재하고,

보는 눈이 많아서라도 아이에게 해코지는 못할 것이라는 판단인 것이다.

그리고 겸사겸사 단순한 돌봄보다는 엄마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무언갈 배울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마음으로

아이에게 뒷모습을 보여야 하는 부모의 죄책감을 달래 보는 셈이다.

학원을 선택함에 있어서도 고려할 점이 더 있다.

유아부터 저학년까지의 부모들이 가장 크게 고려하는 점은 아이의 픽업 문제다.

세상이 변해 어린아이들이 혼자 다닐만한 세상이 이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학원차량은 부모들의 필수 선택이 된다.


나와 남편은 이 학원차량이 사실 싫었다.

학원차량을 믿을 수 없었다.

실제 동네를 돌아다니며 학원차량들이 무섭게 운전하는 모습을 한두 번 목격하는 것이 아닌 데다가,

노란 차량임에도 불구하고 깜빡이를 차 옵션으로 달았는지 도통 깜빡 대는 꼴을 못 보았다.

어디 이뿐이랴, 불법유턴에 신호 바뀌는 타이밍에 휑하니 달려가는 차량을 너무 많이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차량에 아이를 태워 보내는 것이 너무 불편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는 게 많으면 독이 된다고.....

뉴스에 잊을만하면 튀어나오는 스쿨버스 통학차량 사고들이 있기에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를 학원에 보내겠다 마음먹지 않았다.

되도록 부모가 픽업할 수 있도록 늦은 시간 보육이 가능한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보내면 보냈지

학원 선생님을 통해 차량으로 아이를 이동시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가 생각하는 아이가 학원에 가는 적절한 나이는 8세 이후였다.

혼자서 동네 학원을 집에서 다녀올 수 있는 나이....

최소한 아파트 비밀번호를 큰소리로 외치지 않아도 되는 나이....;;;;;

혼자 아파트 현관문과 집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보내겠다 마음먹었는데,

엄마 아빠의 희망사항과는 달리 아이는 이미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태권도 정도는 가야 한다는 현실을 알고 있던 것이다.


우리는 결국 아이의 논리에 졌다.

그나마 우리가 얻어낸 부분은 학원차 대신 엄마와 걸어 다니는 것으로 정리하였다.

백수 2주 차.....

그렇게 나는 과거 나의 엄마가 그러했듯이

또 고모가 그러했듯이.....

진짜 레알 “엄마”의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ㅠㅠ

엄마의 첫 번째 미션....

스케줄에 맞춰 아이 데리고 다니기.... 시작인 셈이다.


아! 우리 부부가 아이를 태권도를 보내며 기대한 부분이 사실 한 가지 있었다.

올빼미 아들의 체력을 방전시켜 빨리 잠자게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현재 이 실험은 진행 중인데 결과를 예측할 수 있을만한 일관성 있는 데이터가 나오고 있다.

저녁에 운동(이라 쓰고 사실 놀고 옴)을 하고 온 아이는 기존보다 더 들뜬 상태가 되어 돌아오고 있다.

 

에너지 준위


모든 비유가 화학이라 좀 그렇기는 한데.... 직업이 직업인지라....ㅋㅋㅋㅋ

화학에서는 가장 안정한 에너지 상태를 우리는 바닥상태 (ground state)라고 한다.

우리 아이는 이런 바닥상태로 아침 일찍 등원하여 약간 activation 된 상태로 하원을 하고, 

태권도장에서 수련을 통해 에너지 준위를 번쩍 뛰어넘어 완벽한 activated 되어 돌아오는 것이었다... ㅠㅠ

이렇게 에너지 준위를 확 뛰어넘어 돌아온 아이는 다시 ground state 가 될 때까지 온 에너지를 방출한 뒤 쓰러지게 된다.

그래 또 늦게 자기 시작했다....



결론은 힘들다... 너무 힘들다....

대체 이 엄마 노릇이란 건 언제가 되면 익숙해진단 말인가...ㅠㅠ

쉽지 않은 1년의 시작이란 생각이 든다.....

1년 뒤 나는 생존이 가능할까.....ㅠㅠ

왜 학원차량을 거부해서 나는 이런 개고생을 사서 하는 것인가...ㅠㅠ

내 몸이 더럽게 힘들어도 아직 차량을 믿지 못하는 내가 이상한 것인가...

아니면 아직 믿을 수 없는 환경이 이상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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