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티처의 잡생각 3
최근에 초등학교 1학년 수업을 보게 되었다. 수업자는 아이들이 재밌고 즐겁게 수업하며 모둠활동에 협력하는 수업을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교사에게 집중하지 않고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면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고민이 된다고 말을 했다.
그런데 수업 속의 아이들은 너무나 수업에 잘 참여하고 있었다. 집중할 땐 집중하고 모둠 활동할 땐 활발히 활동했으며 무엇보다도 궁금한 것을 열심히 질문했다. 교사 또한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질문을 환대하며 대답을 해주었다. 아이들의 질문하는 모습을 보면서 같이 수업을 보는 선생님들은 여러 번 행복한 웃음을 웃었다. 이렇게 열심히 배우고 있는 아이들이라니, 이렇게 창의적인 아이들이라니... 수업을 보면서 이처럼 행복해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면서 내 안에 이런 잡생각이 올라왔다. ‘이런 아이들의 창의적이고 끊임없는 질문을 누가 죽였지?’
이어서 본 중학교 학생들의 모습은 조용하면서 순종적이며 협력적인 수업이었다. 하지만 질문은 거의 없었다. 그다음에 또 고등학교 수학 수업을 보게 되었는데 수업자의 고민은 수준차가 있는 아이들의 학습차이를 어떻게 극복하며 수업을 할 수 있을까였다. 하지만 수업자는 아이들에게 거의 질문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이전 학년에 배운 내용을 모두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듯 질문과 동시에 교사가 바로 답을 했다. 또한 아이들이 오답을 제시했을 때는 바로 교사가 수정을 해주었다.
이렇게 며칠 간격으로 초, 중, 고의 수업을 보게 되면서 내 안의 잡생각은 계속 커져갔다.
‘질문이 살아있는 수업’이라고 말하는데 누구의 질문이 살아 있어야 하지? 교사의 질문이 살아있어야 하나? 학생의 질문이 살아있어야 하나? 교사의 질문이든 학생의 질문이든 질문을 누가 죽였지? 질문이 왜 살아나야 하는 거지? 어떻게 살려내야 하지? 누구를 위해 살려내야 하지? 수업에서 살아나야 할 것은 무엇이지?
꼬리에 꼬리를 문 잡생각은 계속 커져만 갔다. 그러면서 이번 호에는 이것을 제목으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원고를 쓰려고 제목을 치고 나니 갑자기 질문이 생겼다. 나 또한 질문을 쓰고 바로 내 답을 제시하지는 않았나? 독자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이번 호는 제목만 쓰고 내용은 없이 내보낼 생각으로 제목 밑에 원고 없이 빈 여백으로 원고를 보냈다.
예상대로 편집장님은 당황했으며 편집진들의 회의를 통해 결국 내 시도는 불발이 되어 이렇게 원고를 쓰게 되었다.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다고 받아들이지만 아마도 이러한 과정 또한 질문을 죽이는 하나의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그냥 생각일 뿐이지 정말 그렇게 느꼈다는 것은 아니다.)
헛손질의 시간 가져보기
아이를 키워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아이들이 얼마나 호기심이 많은지. 호기심이 얼마나 창의적인 질문과 말들을 쏟아내게 하는지.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이런 기도를 했었다. ‘ 학교가 아이의 질문을 죽이지 않게 해 주세요. 지금까지 누린 배우는 즐거움을 빼앗기지 않게 해 주세요.’ 하지만 아이는 초2 때부터 조금씩 호기심과 학교 공부의 즐거움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중학교만 가도 이미 의욕을 잃은 아이들이 많다. 그들이 수업시간에 말을 하고 질문을 맘 놓고 하게 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몇 년 전에 어떤 수업을 보았는데 개별적인 활동을 하며 답을 찾아가는 아이들이 수업시간 25분이 넘도록 계속 헛다리를 짚으며 이상한 질문들을 반복해서 했다. 교사는 답을 제시하거나 오류를 수정해주지 않았다. 수업자의 의도는 아이들이 되도록 실수를 많이 하게 하는 것이었다. 수업자는 그런 시간을 통해 아이들이 어떤 오류를 범하며 어떤 선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했다. 또한 아이들이 자신의 오답에 대해 계속 고민할 시간을 주어야 정답을 확실히 받아들이기 때문에 헛손질처럼 보이는 그 시간이 자신만의 생각의 회로를 만드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다시 이번에 본 초등 1학년 수업으로 돌아가 보자. 왜 이 수업에서 다른 시간에 보지 못했던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을까? 선생님은 수학책에 나온 사각기둥, 원기둥, 원 모양의 물건들을 일상생활에서 찾아서 모둠별로 나누어 주었다. 어떤 물건들은 정확한 사각기둥, 원기둥, 원이 아니라 비숫한 모양이었다. 이 물건들을 가지고 교과서에 나오는 실험을 해보니 교과서의 정답 이외의 엉뚱한 결과가 나왔다. 아이들은 자신이 본 것과 교과서의 정답 차이에 대한 궁금증을 쏟아냈다.
교구를 준비한 교사의 실수(?)가 오히려 더 많은 배움을 이끌어냄을 확인했다. 그것은 단지 오답을 수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교과서와 실제의 삶이 어떻게 다른 지도 알게 했다. 수학이라는 교과가 정의가 부합한 것에 한정되어 규칙이 허용된다는 것을, 실제의 생활에서는 수학이 포함하지 못하는 많은 상황이 있다는 것을 말이 아닌 몸으로 느끼게 해 준 것이다.
앞서 말한 고등학교에서의 수학 수업에서 수업자의 마지막 고민은 마지막으로 제시한 모둠 과제를 학생들이 잘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실제 수업에서 첫 번째 발표한 학생이 잘못 풀었는데 이어서 나온 두 번째 학생도 잘못 풀자 선생님이 당황했고 서둘러 발표한 학생을 들여보내고 자원자를 뽑아 풀게 했다. 다행히 그 학생이 맞게 풀면서 수업이 끝났다. 수업자가 그 부분이 아쉽다고 하니 참관한 선생님 중 한 명이 이렇게 제안했다. "각 모둠별로 한 명씩 나와서 풀게 한 다음에 그중 오답이 나올 때마다 왜 오답이 나왔는지 학생들에게 생각해보게 하면 어떨까요?
당연하지 않게 질문하기
질문과 발문 요령에 대해서, 질문이 살아나는 수업에 대해 다양한 책이 많이 나와있다. 나 또한 그런 책들을 읽으며 아하를 연발하며 그 조언들을 받아들인 적이 있다. 그런데 "누가 질문을 죽였는가?"와 같은 질문이 떠오른 것은 처음이다. 익숙한 단어와 현상들을 너무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면서 살아온 것은 아니었을까? 학교라는 인위적인 제도에 억지로 앉은 학생 개개인 속에 숨어있는 그 많은 호기심과 질문들을 어떻게 끌어낼까?
많은 교사가 고민한다. 고민을 해결하는 방법은 기술적인 것일까? 어쩌면 관계의 문제이지 않을까? 그것을 넘어 한 인간에 대한 궁금증의 부재는 아닐까? 학생은 당연히 교사의 수업을 들어야 하고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을 이수해야만 한다는 당위가 교사의 질문도 학생의 질문도 죽여버린 게 아닐까? 수업에서 질문은 학생만 해야 할까? 교사는 가르치는 내용에 얼마나 많은 호기심과 질문을 가지고 있을까? 학생들의 다양한 반응과 질문을 어떻게 환대하며 받아들이고 있을까? 아니면 무시하며 자기 기준에 맞추어 좋은 질문과 나쁜 질문으로 판가름하며 거르고 있을까? 학생들의 질문을 받고 교사들의 질문과 호기심도 같이 커진 경험은 있을까? 내 잡생각은 끝이 없이 이어진다.
제목만 놓고 빈 여백으로 원고를 내보내고 싶었던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독자들이 질문에 대해 어떤 답을 보내올지 궁금하기도 했었지만 그 답들을 통해 나에게는 어떤 질문들이 새롭게 떠오르고 내 생각이 어떻게 수정될지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독자들의 답을 기다리며 궁금해하는 시간은 내 잡생각이 풍성해지는 시간이 되고 나만의 생각을 만들어가는 귀한 헛손질의 시간임을 알기 때문이다.
질문이 살아나길 기대하는 시간
최근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를 보았다. 여주인공 제루샤 에봇에게 처음부터 후원자가 누구인지 알려주었다면 상상이 가득한 편지를 썼을까? 제루샤는 자신이 느꼈던 감정,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상상 속의 키다리 아저씨에게 편지를 쓰면서, 소설가의 꿈과 사랑을 이루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나 또한 이 글을 쓰면서 잡생각은 더 늘어나고 내가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이게 맞나 싶어, 어떻게 원고를 끝마쳐야 할지 모르겠다. 생각한 것을 글로 쓰다 보면 늘 그렇다. 하지만 이렇게 잡생각을 글로 쓰는 시간이 없으면 질문이 생기지 않는다. 생각과 다른 글이 써질 때 새로운 질문이 떠오르며 새로운 글이 나오니까 말이다.
어떤 소설가가 말하길, 글을 쓰려면 카페에 앉아 '그분'을 마냥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단다. '그분'이 임하셔야 글이 써진다고 한다. 결국은 기다리는 시간은 작가가 생각을 키워나가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 수업을 보면서 순간순간 웃고 즐거움을 느꼈지만 또한 희망이자 책임으로 다가왔다. 순진무구한 배움의 욕구와 호기심으로 가득 찬 아이들의 질문이 계속 살아나게 하기 위해서 나는 오늘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묵직한 책임감은 이런 아이들이 있기에 감당해낼 수 있다는 희망으로 다가왔다. 결국 이번 글도 또 낭만적인 결말이 되어버리고 말았다.